우린 구두쇠에서 벗어날 수 없나요?
욕심쟁이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는 어떻게 나이, 빈부차, 국적을 막론하고 그의 명성을 100년도 넘도록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마도 그의 이야기가 개인적인 변화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불러오기 때문일까?
문학에서 가장 질기게 살아남아온 캐릭터들 가운데 하나는 촬스 딕킨즈의 고전 이야기 속의 인색하고, 탐욕적이며, 냉정한 자본가로 부의 축척에 그의 전 일생을 바친 스크루지 영감이다. 우리 모두가 스크루지 영감을 혐오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무도 인정하기 좋아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깊숙한 우리 내면에 스크루지 영감에 대한 묘사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가 가는 길목에 좋은 것들이 가득하기를원한다.
우리들 모두가 스크루지 영감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을지는 모르나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다른 기쁨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존경, 명성, 지식, 권력, 혹은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 얻는 따뜻한 느낌까지 말이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이같은 보상을 얻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카발리스트 바알 하술람은 “세계의 평화”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모든 사람의 본성은 이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을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이다.”
하여, 스크루지 영감이 자기 이익 추구의 달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흥미를 끄는 동시에 우리의 혐오를 산다.
우리 내면의 스크루지 영감을 직면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는 우리 모두들의 내면에 스크루지 영감이 들어앉아 있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감고 넘어가는 것이 쉬웠다. 결과적으로 보면 수 천년간 이런 식으로 꽤 잘 해온 셈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경제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실제 본성과 정면 대결을 하도록 만들고 있으며, 이제 우리가 변화를 해나가야 할 때임을 알리는 경고의종소리를 울린다.
말리가 떠난 후에 세명의 유령이 스크루지 영감을 찾아와 그의 과거, 현재, 그리고 예상되는 미래를 보여준다.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스크루지 영감은 그라는 사람의 실체와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직시하게끔 강요당한다. 그는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보면서 전 일생의 부의 축척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는 사랑과 자비라는 불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유령은 스크루지 영감의 주의를 그 자신에서 돌려서 나머지 인류를 고려하도록 강요한다. 그 유령은 두 아이-남아와 여아-를 보여주는데 이 아이들은 스크루지 영감이 “즐겨온” 초과의 부산물인 무심과 탐욕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스크루지 영감은 이 무심과 탐욕에서 진정한 기쁨을 얻지는 못하였음은 분명하였다. 왜 그럴까?
카발라는 우리 필요 이상으로 얻는 모든 것은 우리 내면을 더 큰 공허함으로 바꾸어버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절대로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의 만족을 향한 우리의 욕구를 확대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필요하고 과도한 만족의 추구에 더 열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위해 가지면 가질 수록 타인을 위해남겨지는 것은 적다. 이것이 바로 그 두 아이를 불행하도록 만든 문제의 근원이다.
오늘날 우리들 또한 현재의 유령의 방문을 받고 있다. 그 유령은 우리들의 본성의 결과를 직면하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유령의 이름은 “ 세계 경제 위기”이다.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 방문의 막바지에 이르르면 스크루지 영감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는 가슴으로 절규한다. “ 영혼이여! 들어 주소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오. 지금껏 그래온 것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모든희망을 비켜갔다면 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오?”
우리들 또한 우리 본성을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카발라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상위의 힘”의 도움으로 우리의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는 “완전한 기도”를 올려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껏 그래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내적인 깨달음에 이르러야하며,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을 더이상 참고 견디기를 거부해야함을 의미한다. 그 때서야 우리는 “상위의 힘”의미덕에 의해 즉각해서 변화될 것이다. 즉, 우리 내면의 진실한 요청이 있을 때에만 더 발달되고 이타적인 상태인 우리의 미래가 우리 내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스크루지 영감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타인에 대한 사려와 동정으로 가득한 새 사람이 되어 깨어난다. 딕킨스는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스크루지는 그의 약속을 지키고도 남았다. 그는 모든 것을 실행하였고, 그보다 더 많이 했다…그는 좋은 친구,좋은 주인, 좋은 사람이 되었다.”
카발라는 안전하고, 번창하며,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보다 타인들을 더 사랑하는 영적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타인들의 복지를 우리 자신들의 복지보다 더 염려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알 하술람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저술한다:
“모든 사람들은 개인의 이득이 사회의 이득과 동일한 하나의 것임을 이해하는데서 변화와 교정이 일어야 한다.세상이 완전한 교정을 이루는 길은 이것이다.
변화를 거치지 않은 지금에서는 타인들을 만족시킬 수록 우리가 더 충족된다는 것이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