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왜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나? 고통을 피할 수는 없는가?
평화, 행복, 충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만큼 이 물음이 절실한 적은 없었다. 우리 모두 이 물음에 충실히 답할
시간이 왔다. 우리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참우리를 만날 시간이 온 것이다.
피할 수 없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이 물음이 우리를 잡고 있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이기에...
실 우리들은 하나의 영혼입니다.
창조주는 하나의 영혼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수 많은 부분들(전인류)로 쪼개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들 간에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
베품의 본질이라는 창조주에 닮아가서
모두 함께 창조주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연과 우주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정확하고 목적이 있는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들 스스로를 연구해 보면 창조의 정점인 인류는 이 합리적 법칙의 체계로부터 벗어나 그 밖에 존재하는 듯 함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자연이 얼마나 지혜롭게 우리 몸을 창조하였고,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이 얼마나 정확하고 목적이 있게 작용하는지를 관찰할 때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왜 모든 생물이 존재하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연관관계를 형성한다. 목적없이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질 세상은 움직임, 전환, 순환이라는 정확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물음인 "왜 이 모든 것들(우리들 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최소한 한 번이라도 이 물음이 머리를 스쳐가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현존하는 과학적 이론들은 세상은 우리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변화시킬 수 없는 물리적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들이 할 일은 그 법칙들을 현명하게 이용하여 잘 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기반을 닦아 주는 것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살아 간다고 하여 미래 세대가 존재할 것인지, 혹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삶에는 중요한 날짜가 두개 있다. 태어남과 죽음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독특하고 그리하여 매우 귀중한 것이 될 수 있다. 또한 암흑과 혼돈으로 끝이 나는 경우에는 의미없는 삶으로 마감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목적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현명하고 고유한 자연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몸 속의 모든 세포, 모든 아톰이 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법칙과 목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카발리스트 미하엘 라이트만의 저서 "Basic Concepts in Kabbalah" 중에서-
카발라에서 말하는 새해
새해 결심이 작심 삼일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카발라가 어떻게 진정하고도 지속적인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매년 새해가 시작이 되면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들 스스로와 우리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결심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우리들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우리들의 결심은 쉬이 잊혀져 버리거나 짧은 시기의 변화에 그칠 뿐이다.
카발라에서는 연중 어느 때라도 새해가 될 수 있다. 새해는 기쁨과 평화, 그리고 지속적인 충만함을 가져오는 우리들 내면의 지속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실제로 히브루어로 새해는 "로쉬(머리) 샤나(변화)"이다.
카발라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는 완벽한 기쁨과 충만함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안내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이 된다. 이것이 곧 영적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준비
영적 삶으로 가는 여정은 우리들 현실 인식에 대한 눈을 뜨게 한다. 우리 스스로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어떤 것을 배울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들 여행자들이 알고 있어야 할 몇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카발라의 지혜는 종교, 국적, 성, 나이 등과 상관없이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분명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것이 카발라의 지혜이다.
2. 영적 세계를 여행하기에는 우리들의 오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카발라는 우리로 하여금 전체 현실을 느낄 수 있는 식스 센스를 발달시킬 수 있도록 해 준다. 카발리스트들이란 이미 이 "식스 센스"를 발달시킨 사람들로, 그들이 영적 현실을 경험한 후에 그 영적 세계를 "뿌리의 세계" 혹은 "원인의 세계"라고 불렀다.
3.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의 연구의 결과를 그림같고, 상징적인 언어(브랜취의 언어라고 함)로 적어놓았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결론을 공식으로 요약하듯이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의 발견을 특별한 단어와 이름으로 묘사하고 기록한 것이다. 이 단어와 이름들은 우리들이 익숙한 용어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보통 그러하듯 이 용어들은 월, 연, 계절, 그리고 자연 등과 연관되어 있다.
4. 영적 세계에서 시간은 우리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적 시간"은 조건이나 단계의 일련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어떤 사람이 변화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들 영적 발전 속에서 다양한 단계를 거쳐간다. 우리가 영적인 달력을 이야기할 때 언제라도 새해가 될 수 있다.
영적 새해
영적 피라미드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카발리스트들은 몸 속의 세포들처럼 모두가 단결되고 조화롭게 행동하는 현실을 묘사한다. 이 단계는 "공통의 영혼"이라고 불리어지고, 이것은 우리의 모든 영혼들이 하나의 영혼으로 통합되는 느낌을 암시한다.
그 공통의 영혼이 어느 단계에서 부서져 많은 개개의 영혼들로 산산히 흩어져 서로의 연결의 느낌을 잃었다. 수 세대에 걸쳐서 카발리스트들은 각각의 영혼들 내면에서 그들이 다른 모든 영혼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그 참상태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나기 시작할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내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도록 만드는 내적인 움직임이 깨어나는 때인 것이다.
움직임은 "심장 속의 한 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심장 속의 한 점이 일깨워지면 삶에 무언가 부족한 듯하고, 평화롭지 못한 느낌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를 부추겨서 해답을 발견할 때까지 찾아 헤매도록 만든다. 이 느낌은 어떤 이가 그의 기억을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과거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어서 명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 편히 있을 수 없는 그런 느낌에 빗댈 수 있다. 이 같은 찾아 헤맴과 내면의 영적인 전환의 때를 가르켜 새로운 시작, 혹은 "카발라의 새해"라고 한다.
심장 속의 한 점이 이미 일깨워진 사람들은 그것을 발전시키고 키워나가라고 카발리스트들은 권유한다. 그럴 때 당신이 밟아 나가는 한 발, 한 발에 우리 삶이라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이 밝혀질 것이다. 그 퍼즐의 모든 조각들이 함께 끼워맞춰질 때, 현실에 대한 새로운 그림이 펼쳐진다. 거기에서 당신은 영원하고 조건없는 사랑의 고리에 의해 상호 연결되어 하나로 단결된 모든 영혼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변화의 시작이 "영적인 새해"의 시작인 것이다.
매 가을 황새 무리는 남쪽을 향해 날아간다. 육지와 바다를 건너는 그들의 여행은 아주 길고도 험난하다. 그들은 추운 북쪽의 육지에서 시작하여 따뜻한 아프리카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한다. 내년 가을에 하늘을 바라 보면 당신은 브이자 모양의 황새 무리를 볼 것이다. 왜 그들은 브이자로 날까?
과학자들이 그 이유를 발견했다. 새가 날개짓을 할 때 그 뒤의 새의 비행을 쉽게 해 주는 타성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브이자 모양으로 나는 새의 무리가 혼자 나는 새보다 훨씬 더 긴 거리를 갈 수 있는 이유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한마리 황새가 허약해지거나 다쳐서 그 무리에서 뒤쳐지게 될 때 다른 두 마리의 황새들이 즉각해서 그 옆으로 날아가 동료 새를 보호하고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약해진 새가 다시 무리와 함께 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때까지 곁에서 도운 후에야 비로소 무리에 합류한다.
이 황새들의 비행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공통적인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집단 속에서 단결한다면 그들은 목표점에 훨씬 더 빨리, 더 쉽게 도달할 것임을 배울 수 있다. 각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을 도와 함께한다면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항상 카발라를 여럿이 단체로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의 흐름에서 벗어나 삶 자체의 근원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면 그 때가 바로 카발라가 들어 설 때이다.
카발라는 2000년 전쯤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에 대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인류는 유일신 종교 개발에 이어 과학에 전념해 오기 바빴다. 종교와 과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 물음이란, “우주에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즉,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등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2000년간 일궈온 수확만으로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란 불가능함을 느끼고 있다. 종교와 과학이 제공하는 대답들만으로 그들을 완전히 만족 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삶의 목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물음을 풀어 줄 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아 나선다.
그들은 동양의 가르침, 운세, 마술, 신비주의 등으로 관심을 돌리고, 그 중 소수는 카발라에 귀를 기울인다. 카발라는 이같은 근원적인 의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하여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그 지혜는 이런 의문들에 직결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카발라는 5000년 전쯤 지금의 이라크 자리인 고대 국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현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카발라 뿐만 아니라 모든 고대 가르침과 신비주의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러 다른 종류의 가르침에 믿음을 두었고, 한 번에 하나 이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점성학, 운세, 수점, 마법, 주문, 악령 등과 같은 기타 모든 것들은 고대 세계의 문화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달하고 번성하였다.
자신들의 믿음에 만족하는 한 사람들은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안정된 삶과 즐거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들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커녕, “삶의 법칙을 창조한 것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와 같은 중대한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것이 사소한 차이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삶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과 삶을 구체화시키는 법칙들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수준의 지식이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자동차를 제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의 차이와 같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는가? 그 현실은 우리 없이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 내면의 본질에 따라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 창조물인가? 현실이란 우리가 보는 주위의 모든 것을 의미함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집, 사람, 우주 전체…현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혹은 그렇지 않나?
아침이다. 당신은 눈을 뜨고 기지개를 편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고, 햇살은 눈 부시게 빛나며, 새들도 즐겁게 지저귄다. 그런데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 잘못된 것같은 느낌이 든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잠자리에서 일어 나고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어제는 완벽한 하루였던 것을 기억한다. 어제는 잠에서 깬 순간부터 멋진 하루가 될 것임을 알았고, 하루종일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그리고 오늘, 당신은 침대에서 나오는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사이 무엇이 바뀌었는가? 현실이 바뀌었는가? 아니면 당신이 변했는가?
카발라에 따르면 이 세상이라는 풍경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상”이란 인간이 느끼는 어떤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떤 사람의 내면의 본질이 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힘, 즉 자연의 힘의 본질과 대등한 정도를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자연의 힘이란 무엇인가? 카발리스트들에 따르면 그것은 절대적 사랑과 베품이라는 본질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인간이 인지하는 “세상”이란 바로 인간의 본질과 자연의 본질 사이의 균형의 정도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디오 수신기를 예로 들어보자. 라디오 방송국들은 끊임없이 방송을 내 보내고 있지만 어떤 주파수에 라디오를 맞추어만 우리는 그 방송을 들을 수 있다. 라디오 수신기는 어떻게 방송을 “잡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라디오 수신기가 그 외부의 대기 중에 있는 소리파와 동일한 내부 주파수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즉, 라디오 수신기는 그 내부의 주파수를 바꾼 후에야 비로소 방송을 “잡을 수” 있었지만, 사실 소리파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카발리스트들은 우리가 이와 똑 같은 방법으로, 다시 말해 우리 내부에서 발생시키는 “주파수”에 따라서 우리 외부의 현실을 인지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를 둘러 싼 외부의 현실은 우리 내부의 본질에 완전히 의존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오직 우리 자신들만이 그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정한 삶은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현실을 인지하는 법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다섯 개의 “구멍” - 눈, 코, 입, 귀, 손- 을 가진 상자라고 가정해 보자. 이 기관들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우리의 오감을 대표하며, 우리는 이 오감을 통해 현실을 인지한다. 어느 정도까지 소리를 듣고, 어떤 색을 볼 수 있는지 등은 우리 감각의 인지에 완전히 좌우된다.
우리의 청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예로 들어 보자. 먼저 고막 바로 곁에 모인 음파는 진동을 유도하고, 그 고막의 진동으로 중이 속의 뼈가 움직이게 되며, 그 결과 신호가 뇌에 전달되면 뇌는 그것을 소리나 목소리로 해석한다. 이것이 우리가 듣는 법이다. 즉, 모든 청각 과정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다른 모든 감각들도 같은 식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감각들을 통해 도착하는 신호들은 뇌의 조절 중추 부위로 가고, 거기서 이미 우리 기억에 존재하는 정보와 새로 들어온 정보가 비교된다. 그 비교를 토대로 이제 우리 뇌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풍경을 묘사한다. 이 과정으로 인해 우리는 마치 어떤 특정한 “곳”에 살고 있듯이 느낀다. 비록 그 “곳”은 사실 우리 안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인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단지 외부의 자극에 대한 우리 내부의 반응이다. 우리는 “상자 안에 갇혀 있으므로” 그 밖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실상 알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그림은 우리 감각들과 뇌에 존재하는 정보의 구조의 산물이다. 과학은 수 년 전에 인간의 뇌를 전기적으로 자극함으로써 마치 우리가 어떤 장소와 상황에 처해 있듯이 느끼도록 만들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실 자연 과학자들은 이미 동물의 종류에 따라 세상을 인지하는 법이 다름을 알고 있다. 고양이는 어두운 곳에서 우리보다 6배나 더 잘 볼 수 있고, 개의 청각은 우리보다 훨씬 민감하고 정확하다. 개는 사람이 어떤 소리를 듣기 훨씬 전에 이미 그 소리를 듣는다. 인간의 눈은 보라와 빨강 사이 라는 파장에 맞춰져 있기에 우리는 자외선과 같이 보라색보다 짧은 파장을 볼 수가 없다. 우리와 달리 벌들은 자외선을 인지할 수 있어서, 그것을 여러 종류의 꽃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사용한다. 이런 예들은 인간에게 다른 감각들이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그림의 현실을 인지 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모든 것은 꿈에 불과하다
인간은 두가지 수준의 내면의 본질에 의존하여 현실을 인지 할 수 있다고 카발리스트들은 설명한다.
첫번째 수준에서 인간의 내면의 본질은 “이기주의”인데 이것은 자연의 본질에 정반대 된다. 이 “이기주의”라는 본질은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으며, 우리를 다른 이들로부터 분리 된 듯 느끼에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도록 부추기기까지 한다. 또한 우리가 현실을 전쟁, 투쟁, 빈곤과 부패로 인식하는 것도 이 “이기주의”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기주의적 인식으로는 진정한 만족에 이를 수 없음을 배웠다. 우리가 이기주의적으로 현실을 감지한다면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경험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더 높은 수준에서의 우리 내면의 본질은 자연의 힘과 동일한 절대적 사랑과 베품이다. 세상을 이런 방법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모든 이들이 상호 작용 속에서 일하며, 끊임없는 즐거움의 사회를 창조하는 가운데 하나의 체계 속에서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해내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카발라에 따르면 첫번째 수준에 기반을 둔 삶은 단지 우리가 지나치는 단계에 불과하며, 그 이기주의적 삶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 스스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꾸도록 하는 데 있다. 현실에 대한 지각을 바꾸는 법을 배운 카발리스트들은 우리 현재의 실존을 “상상의 삶” 혹은 “상상의 현실”이라고 정의한다. 그와 반대로 교정된, 전체적이고 완전한 실존을 “실체의 삶” 혹은 “진정한 현실” 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들은 이전의 이기주의적 인식을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마치 꿈과 같다고 묘사한다.
이것은 곧 현재 상태에서 참된 현실은 우리로부터 감춰져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현재의 이기주의적 관점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진정한 현실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상호 작용 관계를 거부하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상상키조차 어렵다. 우리 안에 새겨져있는 이기주의적 욕망은 그런 연결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에 대한 참된 사진을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의 이기주의를 자연이 가진 본질과 같은 사랑과 베품으로 전도시킬 수 있다면, 예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완전히 다른 것들을 느끼고 지각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전에 보았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완전하고, 영원하며, 의미있는 그런 것들로 말이다. 카발리스트들은 이것을 일컬어 “거꾸로 된 세상을 보았다” 라고 묘사한다.
직접 보고 느끼라
우리 삶의 목적은 우리가 현재 처한 제한된 실체에서 영원하고 참된 실체로 자발적으로 올라가기 위함이라고 카발라의 지혜는 가르친다.
어떻게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가? 이기주의적 인식을 깰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그 “이기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에 접속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격의 카발라 서적이 필요한데, 그것은 참된 현실의 사진을 발견한 이들에 의해 씌여졌기 때문이다. 그 같은 책에서 카발리스트들은 사실상 우리 눈 앞에 존재하는 완벽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의 방송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저 우리 내부의 주파수를 바꾸어야 할 뿐이다.
참된 현실에 대해 더 읽으면 읽을 수록, 우리 감각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가 걷히면서 우리는 그 현실을 실제로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상 책의 본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카발리스트들은 설명한다. 우리가 읽는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문제없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려는 욕구가 강하고, 진실하다면 그 참된 현실의 높이에 다가설 수 있음을 카발리스트들은 강조한다.
“비록 그들이 공부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려는 열망과 대망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빛을 끌어 당긴다. “
랍비 예후다 아쉴락
현재 우리가 느끼는 삶과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삶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조하르(Zohar)는 그 차이를 작은 촛불 빛과 무한한 빛, 혹은 한 줌의 모래와 세상 전부 등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진실로 알고 싶다면 직접 보고 느끼라고 카발리스트들은 권유한다
왜 당신이 휴가를 가고파 하는지 궁금해 해 본적이 있는가? 당신 집에서 찾을 수 없는 그 것, 당신이 다른 어딘가에서 찾고 있는 그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바로 우리 눈 앞에, 아니 오히려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카발라는 설명한다.
-일탈을 찾아서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정보의 자유, 발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창조의 자유, 자유 투쟁가, 배움의 자유, 경제적 자유, 자유 시간…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자유를 만들어 낼 수 있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자유라는 것이 존재 하기나 하는가? 특정한 어떤 것에 대한 자유가 아니라, 단순히 모든 의미에서 제한 받지 않고 제약 받지 않는 자유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 자유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가?
카발라에서 말하기를 자유가 존재하기는 하나,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자유란 일상의 탈출이고, 매일 부딪히는 삶의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고민, 스트레스, 직장 상사, 그리고 은행 빚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현실에서 도망쳐 잠시 숨을 돌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 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은 후, 마침내 아름다운 해변의 모래 사장에서 조그마하게 나마 그에 대한 보상의 순간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조차 우리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호텔 아니면 비행기, 아무 문제도 없다 싶으면, 갑작스레 애들은 어쩌면 그리도 딱 맞추어서 아프다고 보채는지...어떤 식이든 대부분의 휴가는 우리가 꿈꾸었던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운좋게 그 완벽한 휴가를 갔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 우리는 휴가가 곧 끝나고 말 것임을 되새기고, 눈 깜빡할 새 “현실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 오고 만다.
잠시 멈춰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물음들이 쏟아질 것이다. 일상에서의 탈출이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만약에 지금과 다른 삶의 방법이 존재해서 자유를 찾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영원하고 완벽한 꿈의 휴가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가?
-자유는 이 세상 너머에 있다.
그런 자유는 사실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려면, 이 세상의 틀 안에서 그러한 자유 찾기는 포기해야 한다.
카발라의 지혜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지는 것만 빼고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자. 당신은 가족이나 당신의 재능, 자질 등을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았고, 어릴 때는 지속적으로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다른 교육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좀 더 자라면 사회와 매스컴이 사실상 당신 삶의 모든 것을 감독한다. 무엇을 입을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무엇을 동경할 것이며,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사랑할 것인지 등과 같이 말이다. 심지어는 아름답고 추하다는 것, 옳고 그름, 적절한 예절, 표현 또는 행동의 양식과 같은 개념들 조차도 사회 환경에 의해서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이 세상에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받아 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에대해 카발라는 참 흥미롭게 설명한다. 카발라에 따르면, 일단 이 세상에 자유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면, 당신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향한 당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유명하고도 중요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면… 전 세계가 궁금해 하는 그것은 “ 우리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짧은 물음이다.
-카발리스트 예후다 아쉴락, 탈무드 에세르 세피롯 서문에서
카발리스트들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열쇠라고 말한다. 이 지구상에 적어도 한번 이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 자신들만이 아는 그 깊은 내면의 늪에서 우리들은 이렇게 자문해 본 적이 있다.
“우리들은 왜 여기에 있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카발리스트들은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이 주어져야 한다고, 혹은 답이 있다고 조차 생각하지 않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그런 물음이 솟아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기를 회피한다.
또한 우리는 그런 물음들을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편리하게 느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즉, 무언가에 대한 의미를 묻기보다는 삶의 희노애락 속에 묻어 버리는 편이 사회적으로 훨씬 더 당연하게 받아 들여진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우리 세대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음 자체는 여전히 통렬하고 격렬하게 건재하고 있다가, 가끔씩 불청객마냥 나타나서는 우리 마음을 들쑤셔버리고, 우리를 절망에 빠뜨려 버리고 만다. 어제마냥, 삶이 흘러가는대로 생각없이 따라 가는 그 흔한 책략을 쓸 새도 없이 말이다.
-카발리스트 예후다 아쉴락, 탈무드 에세르 세피롯 서문에서
우리가 개발한 그 번듯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조차도 삶의 의미를 찾기를 회피하기 위한 시도 속에 탄생되었다.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활동으로 스스로를 바쁘게 한다. 필요도 없는 정보를 다운로드하며 하루 종일 텔레비젼을 보고, 인터넷 세상 속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놀이 동산에 가는 등 우리 스스로를 산만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갈구하는 자유에게로 인도해 줄 그 물음을 우리 스스로 억누르고 있다고 카발리스트들은 말한다. 휴가를 감으로써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대신 우리는 삶 자체를 완전히 판이한 경험으로 바꿀 수 있다. 마치 매 순간, 끊임없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그런 완벽하고 영원한 휴가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는가? 사실 그것이 정답이다. 그런 자유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세상 너머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그 곳이 어디인지 또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카발라가 가르쳐 준다.
-어떻게 하면 거기에 이를 수 있는가? “인간은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과 그 자신의 영적 실체를 연구하고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카발리스트 예후다 아쉴락, 샤마티(책명:나는 들었다) 열 여덟번째 편지에서
모든 것은 “도망치기를 멈춘다”는 이 단순한 결정에서 시작된다.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이 어둠 속에 묻히지 않도록, 그 물음이 빛을 보도록 최선을 다 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 물음이 물질적으로 삶을 향상시킨다거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오직 진정한 삶의 근원에 대해 묻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은 삶의 근원, 혹은 창조주와 당신의 접속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즉, 이 물음에 답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창조주와 연결되기 시작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발리스트들은 창조주와의 접속이란 것은 내면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네 삶의 근원에 스스로를 연결시키면 시킬 수록 너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 근원이란 어떤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자유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산을 오르거나, 지구 반대편을 여행하거나, 일상에서 도피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단순하고도 내적인 삶의 목적에 관한 물음이 우리 안에서 깨어나서, 우리를 인도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 뿐이다. 그럴 때, 우리 앞에는 “완전함”으로의 길이 열릴 것이고, 마침내 우리는 진정하고 영원한 자유에로의 여정에 오를 것이다.
질문: 왜 카발라를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라고 합니까?
대답: 카발라는 과학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따름입니다. 카발라는 5000년전 고대 바빌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 인류가 단결되어 있었고 한 국가로서 함께 뭉쳤습니다. 에고이즘(이기주의)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기 시작했지요; 그들은 점점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현재 우리가 아브라함이라고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이에 대한 치유책으로 어떤 방법을 제공했습니다. 점점 자라는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다시 단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었지요.
그가 발견한 방법은 과학적 방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내적인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탐구 도구들을 이용한 방법이었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카발라의 지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은 카발라의 지혜보다 훨씬 늦게 탄생하였고, 실제로 카발라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문: 특정 종교를 따르면서 카발라를 공부할 수 있습니까?
대답: 네. 어떤 사람이든 카발라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 종교에 속하든지 완전한 비종교인이든지 무관합니다. 카발라의 지혜는 이 모든 것들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단지 종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믿음이나 수행 등을 포함하여 당신 삶에서 행하는 어떤 것들과도 상관없이 카발라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 참된 카발라 가르침과 마돈나와 같은 유명인의 종교적 체험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 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참된 카발라를 공부하려면 정격의 출처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카발라는 기본적으로 다섯 종류의 정격의 출처를 사용합니다. 그에는 아브라함의 저서인 창조의 책, 오늘날 우리가 모세 5경으로 알고 있는 모세( 토라 혹은 구약 성서의 첫 5권이라고도 알려져 있음), 그 다음으로는 조하르의 책, 아리의 저서들, 그리고 20세기의 랍비 예후다 아쉴락의 저서들이 포함됩니다. 그 중에서도 아쉴락의 글들이 우리 세대가 공부하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덧붙여 카발라는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른 어떤 과학과 마찬가지 이지요. 붉은 실, 성수, 점, 신비주의, 마법, 심지어 명상 같은 것들은 참된 카발라에 속하지 않습니다. 카발라는 단순히 실체를 연구할 뿐이며, 이 세상과 당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위하여 당신의 현실 인식의 차원을 높여 줍니다.
질문: 그러나 ‘영적임’이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대답: 네. 영적이라는 것은 우리 보통의 오감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현실의 국면을 일컫습니다. 카발라의 지혜는 단순히 당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높여 줍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부가적인 도구를 줍니다.
물리학이 특정한 도구들을 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카발라는 다른 도구들을 주는 것이지요. 현실의 완전한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과학들이 필요합니다. 카발라는 소위 무대 뒤로 당신을 데려가 줍니다.
자수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앞면에는 풍경이나 꽃 등과 같은 아름다운 한 점의 그림이 수 놓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자수를 뒤집어 놓으면 당신은 이리 저리 엉킨 실들을 볼 것입니다. 그림의 앞면에 아름다운 꽃을 수 놓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실들을 연결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무대 뒤에서 실들을 연결하는 법, 그것이 바로 카발라가 당신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질문: 카발라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까?
대답: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자수의 뒷면에 작용하는 힘들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삶의 모든 실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그 연결들을 이어 갈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하며, 이로써 우리가 저지를지 모르는 실수를 미리 방지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을 조화롭게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는 가족 유대감을 강화시키고, 교육적인 점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자녀들로부터 더 잘 이해받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기 시작하기 때문에 약물 남용이나 우울증과 같은 문제들도 미리 예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저 자연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은 우리와 우리 주위의 사람들입니다. 카발라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사회적, 세계적 수준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세계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기후에서 시작하여 우울증, 질병 등의 우리 개인적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카발라는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거기서 어떻게 당신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날 카발라의 지혜를 널리 알리는 것은 필수입니다.
질문: 창조주와 연결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마치 자신을 염려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모든 이들의 생각과 관심을 체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연결되고, 관련되며 한정된 범위 너머를 느낍니다. 그저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간과 공간 뿐만 아니라 움직임을 너머 존재하게 되지요. 당신은 영원의 인식을 갖게 되므로 어떻게 보면 영원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주고 또 주고 싶어하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질문: 이같은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도 주고 싶어서 당신은 카발라의 지혜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대답: 네, 그렇습니다. 자연과 실체의 조화를 경험할 수록 그것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그것이 단순한 특혜가 아니라 사실상 의무라 하겠습니다. 전 인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조화를 경험하는 단계를 이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는 아무 이유없이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위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 생각하고,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자극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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