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심오한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컴퓨터 앞? 당신 몸 속? 당신 집? 도시? 행성? 당신은 사랑에 빠져있나요? 고통받고 있나요? 당신이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무엇입니까? 이는 무엇을 위한 것이죠?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왜 거기에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면 그런 물음들에 대한 답이 다른 모든 가능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얻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만약 현실이 무엇인지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고 왜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 방법이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두고 있나요?
여기서 시작해 봅시다. 이것이 전체 현실입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 비물질적 잠재력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죠. 모든 것이 우리로부터 숨겨져있습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가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 알고 싶지만 아직 모르는 것 등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전체 현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무한한 기쁨, 자유로운 존재, 완전한 이해,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물질 우주를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힘과의 접속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한 다섯개의 작은 구멍을 가진 닫혀있는 상자이죠. 우리에게 무엇이 실제인지 알려주고 우리를 안내해 줄 이 오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감각들을 가지고는 이곳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실제로 사는 곳이라는 것이죠. 네, 우리는 오직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만을 경험하지요.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제한된 이해, 고립, 달아나는 기쁨, 그리고 고통을 야기시키는 모든 종류의 문제들이죠. 왜 우리는 이 밖에 있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까요? 이 안에 있는 것 대신에요?
전체 현실로부터 무언가가 우릴 방문해 올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절대로 상자 속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각들은 실제 열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자 밖에 존재하는 것은 고막, 혹은 망막, 미뢰, 혹은 신경과 같이 그 밖에 있는 것을 해석하여 정체성, 즉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종류의 저항, 장막, 장벽에 부딪힙니다. 이 무지의 것이 상자에 미치는 영향에 좌우되어서 말이죠. 그러나 감지 장치가 우리에게 주는 해석은 그 프로그램의 방식에 따라 전적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외부의 객관적 현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규율에 따라 현실을 감소시켜 다른 무엇으로 전환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정확히 이와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나 내가 전자 현미경이나 거대한 우주 망원경을 이용하여도 결국 우리는 항상 주관적인 그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의해 결정되고 지배되는 그림이지요. 그러면 그 프로그램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기심-자기 관심사-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여기서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지? 한마디로 그것은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상자는 기계입니다. 내적 프로그램을 거쳐간 무형 무지의 것이 투입되어, 기계가 산출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현실이 아닙니다. 단지 받으려는 의지에게 그렇게 보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이 밖에서는 오직 창조하고, 지탱하고, 안내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다른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제한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이타주의이지요. 우주의 일반적 법칙입니다. 모든 자연과 존재의 뒤에는 이 유일한 자비의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삶을 줍니다. 그것은 상자에 완전히 극과 극으로 받대되는 것이죠. 이는 마치 빅뱅을 블랙홀에 비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고 원하며 행하는 모든 것 뒤에 존재하는 이성과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과 받으려는 의지를 통해서만 삶을 측정하는 한 우리의 진정한 성품, 우리 현실의 본질, 혹은 우리 삶의 목적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끝.
정말로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삶은 잔인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니까요. 비록 때때로 삶이 그런 것이라고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지금처럼요. 당신의 내면의 한 곳에서는 이 좁은 현실에서 벗어날 길이 반드시 있다고 자신하지요. 그렇습니다.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당신이 원하는 방법에 달려있습니다. 그 상자 밖으로 나오려는 욕구가 마침내 충분히 강해지면 다른 종류의 욕구가 당신의 의식 내면에서 조그마한 한 점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원하는 유일한 것은 상자 밖에 있는 프로그램에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일단 욕구의 이 한점이 일깨워지고, 당신이 그것을 발전시킬 방법을 안다면, 그 한 점은 전적으로 새로운 비물리적인 감각의 바탕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더 큰 현실 뿐만 아니라 그 배후의 힘의 사고조차 지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구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형태의 동등성"이라 불리는 비물질적 본성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질 세상에서는 형태와 성질이 매우 다른 두가지 것을 가져와 공간적으로 서로 가까이 둘 수 있고, 그 둘은 가까이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밖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물질 세계에서와 같이 분리된 대상들도 없습니다. 이 밖에는 오직 힘, 영향력, 그리고 우주 일반의 법칙 뒤에 존재하는 생각과 닮은 다양한 수준의 베품만이 존재합니다. 비물질적 세계에서는 다른 성질을 가진 것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가까이있지요. 만약에 정확히 똑같은 성질, 내용물,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실제로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이 붙어있지요. 그러므로 오감이라는 정반대의 이기적인 성질이 우리의 인식을 방해하고 고립과 분리됨, 그리고 끊임없는 부족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지만 당신 가슴 속의 그 미발달된 한 점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본질과 내용물에 무의식적으로 닮아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그리고 당신의 내면의 프로그램을 외부의 프로그램과 닮도록 만드려는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 외부 프로그램에 들어갈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당신 삶 속의 모든 욕구, 모든 행복, 모든 실망,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당신을 발전시켜서 일깨워주기 위하여 안내해주는 현실, 즉 우주 일반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우주 일반의 법칙이 당신에게 주고자 하는 것-그 법칙과 똑같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고, 그리하여 그것이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끼고, 그것이 이해하는 것을 당신도 이해하며, 그것이 행하는 것을 당신도 행할 수 있습니다. 이 추가적인 감각을 발달시키는 방법을 "카발라"라고 부릅니다. 카발라는 종교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며, 마법이 아닙니다. 카발라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입니다. 그것은 우리 감각과 느낌에 대한 지도입니다. 카발라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와 우리 외부의 세상이 구성된 방법과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카발라는 과학입니다. 너무도 근본적이어서 오직 "지혜"라고 불릴 수 밖에 없지요. 카발라는 스승에서 제자로 끊임없는 사슬을 이어오며 수 천년을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인류가 카발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단계적인 발달에 이르고, 그 필요를 느끼게 될 때까지 카발라는 숨겨져왔습니다.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아리(ARI)연구소는 종교, 국적, 나이, 혹은 성별에 상관없이 카발라를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격의 카발라를 제공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당신 가슴 속의 그 한점이 진정으로 더 알고 싶어한다면 여기 링크가 있습니다. 끝. 이번에는 정말로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