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라 기초개요5
곧바른 빛이 거치는 네단계에 대한 서론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바알 하술람의 탈무드 에세르 세피롯(열 세피롯에 대한 연구)의 서문에서 인용한 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합시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왜 카발리스트들은 모든 사람들이 카발라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을까? 진실로 그 안에는 위대한 것이 있으니, 알려질 가치가 있다. 카발라의 지혜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이하고 귀중한 치료제가 존재한다. 비록 우리가 배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배우는 것을 이해하려는 갈망과 거대한 욕구가 있다면, 우리들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빛을 일깨운다.
사람이 아직 완벽함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오도록 되어있는 이 빛은 ‘둘러싸는 빛’이라고 간주된다. 그 말은, 그 빛은 준비되어 있으며, 사람이 그의 받음의 그릇을 정화시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럴 때 이 빛이 그 준비된 그릇에 입혀질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그 그릇이 없다고 해도, 그의 영혼에 연관된 빛과 그릇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 지혜에 관여할 때 어느 정도의 빛은 곧바로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그 빛이 사람에게 비추어지기는 하나, 그 빛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채워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입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수행하는 동안 사람이 얻는 조명은 천상의 은총을 끌어내어 그에게 신성함과 고결함을 충분히 전해주고, 그로인해 그 사람은 완벽함에 훨씬 더 가까워지게 된다.
이 수업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창조에 관한 네가지 단계에 대하여 검토할 것입니다. 이 네 단계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대형 보기판입니다. 이로써 우주가 존재하게 된 방법, 피조물이 창조된 방법, 우주의 각 국면에서 모든 것들이 기원하게 된 방법 등이 설명됩니다.
카발리스트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선 우리들은 토라에 신비함이 존재함을 알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이를 다루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것입니다. 어떤 카발라 서적에도 토라의 신비함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며, 오직 토라의 맛에 대해 말합니다.
이 신비함은 ‘그의 본질’ 혹은 아쯔무토 라고 불립니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금지된다’라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합니다. 이를 설명할 언어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에겐 그릇(켈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달성할 때만 알려질 수 있답니다.
우린 여기서 시작합니다. 창조주와 함께 시작하지요. 카발리스트들의 말씀에 창조주의 시초의 생각은, 이 단계에 도달한 카발리스트들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은 의도에서 시작되었고, 이 의도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 피조물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 쇼레쉬(뿌리) 단계’라 불립니다. 이것이 모든 현실의 근원이지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에게 기쁨을 주려는 의지가 창조의 최초의 취지였기 때문에, 곧장 이 기쁨을 받으려는 의지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각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빛’이고 이것은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그릇이죠. 이것이 최초의 피조물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삼라만상의 빛이 그 빛 전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채우지만, 이 그릇은 거의 무효합니다. 그것은 빛과 매우 잘 결합되어 있어서 실제로 이들은 동시에 생겨났으며, 완벽하게 상호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는 힘, 주려는 욕구가 있고, 이것이 압박을 가하여, 이 정반대의 욕구, 즉 받으려는 욕구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들은 함께 묶여 있지요. 그것들은 말하자면 하나의 생각에서 나온 부분이고 한 묶음이지만, 정반대이죠. 이것이 두번째 식별이라 불리고, 이는 ‘단계 알레프’입니다. 알레프는 히브루어 알파벳의 첫번째 문자이고, 그것은 1의 가치를 지니며, 이것이 첫번째 식별입니다.
빛이 이 첫번째 클리, 받으려는 의지 속으로 들어올 때 그 받으려는 의지는 기쁨을 느낍니다. 허나, 빛은 그 자체의 본성인 무엇을 그 클리 속으로 전달하고, 클리가 이것을 느끼는 결과로 어떤 일이 발생합니다.
이 빛이 끝까지 내려가서 이 받으려는 의지 내면을 전부다 채우게 될 때, 그 그릇은 빛 자체의 본성에 대한 어떤 것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받으려는 의지에 불과하므로, 그것의 프로그램을 토대로 움직이죠. 그것은 주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채요. 그래서 첫번째 식별은 ‘주는 자가 존재한다’입니다. 즉, 이것은 창조주가 아닌 첫번째 무엇입니다. 주는 상태가 존재하고 받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느낍니다. 어떤 것과의 연관 속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죠. .
이 첫번째와 두번째 부분을 세피롯 특유의 표현을 통해 살펴봅시다.
첫번째 식별은 ‘케테르’ 혹은 ‘왕관’이라 불립니다. 두번째는 ‘호흐마’라 불리고요. ‘호흐마’는 지혜를 뜻합니다. 이 첫번째 피조물, 이 첫번째 단계의 피조물이 느끼는 이 빛은 환희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자질에 대한 반응이죠. 피조물이 느끼는, 그 안에 들어오는 이 빛은 ‘지혜의 빛’(히브루어:오르 호흐마)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카발라 텍스트에서 ‘지혜’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것은 이 단계의 이 자질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주는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 결과로, 피조물은 또한 주려는 욕구의 즐거움을 느끼고, 이 즐거움을 가지고자 하죠. 받으려는 욕구인 것이죠. 이 욕구 안에서 새로운 식별이 생깁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이것이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죠, (우선 그것은 완전히 채워졌었죠, 그런 후에 빛의 자질 내에서 감지한 것이 그 안에 결핍됨을 느낀겁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스스로 이에 도달하려는 가운데, 더 이상 받기를 원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원하는 것은 주는 기쁨이고, 그래서 그 주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게끔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받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받지 않는 것 뿐이죠. 다시 말해, 그것은 빛을 거부합니다. 이 단계가 ‘단계 벳’이라 불립니다. ‘벳’은 히브루 알파벳의 두번째 문자이기도 하고, 그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려는 욕구입니다.
이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단계1은 받으려는 욕구이고 단계 2는 주려는 욕구입니다. 이 세피라(단계2)는 ‘비나’라 불립니다. ‘비나’는 ‘힛보네눗’이라는 단어에서 오며,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관찰하고 깨닫는 것은 창조주의 자질입니다. 그것은 주는 것임을 인식하죠. 그러므로 이것은 베품의 자질이죠. 세피라 비나, 단계 벳, 단계2 말입니다.
이 공허의 상태에서 그릇은 또 다른 식별을 얻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들 단계들 내에서, 이들 식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빛의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빛의 행동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빛은 항상 이 근본 법칙만을 이용하지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것을 충족시킨다는 법칙요. 그것이 빛이 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은 클리 내에서, 욕구 안에서, 피조물 내면에서 변화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단계 벳 내부에서, 빛의 결핍 속에서, 발생하는 식별이 있습니다. 즉, 그것의 본성은 실제로는 받는 것이며, 그것은 지혜의 빛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빛에 대한 거부, 빛을 되돌려줌을 일컬어 ‘자비의 빛’이라 합니다. (히브루어: “오르 하사딤”), 그것은 이렇게는 존재할 수 없음을, 그것은 받아야 함을 알고 있죠. 그러나 받는 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베품의 형태인 그런 받음의 방식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다음 깨달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이 단계 기멜, 히브루 알파벳의 세번째 문자입니다. 여기 이 식별이 두가지 단계를 초래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 두가지 정반대의 것이 결합되어 있어요. 오르 호흐마를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단계는 오르 하사딤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두가지 정반대의 욕구들이 이 혼합된 단계 안에 포함되는 겁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이 같은 받음의 방식에서 단계 기멜은 받음을 주는 방법으로 전환시키는 길을 찾은 것이죠
창조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피조물과 창조주-빛과 그릇-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에요. 비록 피조물이 그 자신 내부에서 베푸는 행동을 한다고 느낀다고 해도, 실제로 피조물의 관점에서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창조주 뿐입니다. 단계 기멜은 창조주의 행위를 복사하려는 결심을 하죠. 창조주가 그것이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원함을 알고, 그것은 이 기쁨을 받아야만 함을, 그리고 피조물을 창조하여 베푸는 것이 창조의 생각의 한 부분임을 압니다. 여기서 피조물이 실제로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피조물은 자신 내면의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느 정도의 빛만을, 예를 들어, 빛의 20%만을 받으려는 결심을 하죠. 오직 창조의 생각을,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것을 기쁨으로 채우려는 창조주의 욕구를 이행할 목적으로 받는다는 조건하에서 받는 것이죠. 그렇게 받음으로써 이 창조의 생각을 이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받을 것입니다. 이는 받음이 베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베품은 의도입니다. 행위가 어떻든지 상관없어요. 그것은 의도니까요. 그래서 실제로 이것은 단계0(케테르)과 어느 정도 형태의 동일성에 있습니다.
이 80% 의 오르 하사딤(되돌아가는 빛)은 여전히 기쁨입니다. 그것 또한 그 안에 들어오는 빛이지만, 여기서는 이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피롯에서 이 단계는 제이르 안핀이라 불리고, 실제로는 여러가지의 세피롯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세드, 게부라, 티페렛, 네짜흐, 호드, 예소드가 포함되지요. 이는 베풀기 위해서 받는 것을 허용하는 혼합된 단계입니다.
단계 기멜이 흉내내는 베품의 행위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탄생합니다. 자신의 행위 때문에 단계 기멜은 여기서 빛의 또다른 자질을 느끼는데, 그 자질은 사실상 창조의 생각 그 자체지요. 단계 기멜이 얻은 성과는 단지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자신에게 베푸려는 창조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만을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무한한 기쁨으로 완전히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단계 기멜은 창조의 생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 빛을 받아야만 함을 깨닫지요. 그 빛 전체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빛이 들어와 전체 그릇을 채웁니다. 이것이 단계 달렛, 4이나, 이것은 단계 알레프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다른 일이 여기서 벌어졌어요. 왜냐하면 여기 단계 0, 1, 2, 3의 모든 행위는 독립적이지 않았거든요. 전 행위는 창조주에 의한 것이었지요. 빛의 힘, 매 단계 속에서 만들어진 반응과 욕구는 창조주가 한 행위였습니다. 단계 달렛에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죠. 단계 달렛은 창조주가 배치해둔 것을 정확히 행하며 존재하려는 독립적인 욕구입니다. 여기에는, 이 모든 빛을 받으려는 의도 속에는, 창조의 생각 그 자체와 동일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 시점에서 피조물에겐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욕구의 성질 내에 제한이,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처럼 곧바른 빛을 받고, 이것을 스스로 성취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단계 달렛이 가지는 이 마지막 식별 때문에 창조주의 위상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더이상 곧바른 빛을, 창조의 부분을 행하기를 원치않게 되고, 창조주의 마음을 원하게 됩니다. 창조에 대한 생각하는 부분 말입니다. 창조주와 형태의 동일성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상 시초부터 창조주가 의도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기서 창조 내의 다른 모든 것들이 시작됩니다. 독립적인 피조물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세피롯에서 이 네번째 단계는 ‘말훗’이라 불립니다. 말훗은 ‘왕’ 혹은 ‘왕국’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는 욕구가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스스로만을 위해서 받지 않겠다는 이 새로운 의도는 창조주의 위상을 느끼기 때문인데요, 받는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며, 이것이 제한, 첫번째 찜쭘 이라 불립니다. 여기서부터는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창조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추구합니다.
여기 말훗이 있습니다. 창조의 시작이지요. 그리고 이 그릇, 이 네번째 단계는 ‘올람 에인 소프’라 불립니다. 이는 ‘끝없는 세상’을 뜻하고, 모든 세계들과 영혼들은 여기서 뻗어 나갑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정확히 이 형태를 이용합니다. 이 과정, 이 대형 보기판은 또한 네글자로 된 신의 이름입니다. 보신적이 있을 거에요. 유드의 정수리, 유드, 헤이, 바브, 낮은 헤이, 그래서 하바야하입니다. 이 이름은 이같은 일련의 힘을 나타냅니다.
카발라에서 모든 이름들과 단어들은 물리학에서의 공식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빛과 그릇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시다시피, 카발리스트들은 상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게 된 방법이지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그 지도는 우리가 위로 되올라가는 길에 습득해야만 하는 단계들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적을 부여하고, 근원을 제공하며, 그 길을 따라 공간을 줍니다. 일단 이 제한을 두고 나면, 피조물은 이렇게 행동하는 겁니다. 피조물은 독립적인 욕구로서 창조의 생각에 도달하여 창조주와 동일해질 수 있도록 세계들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은 라이트만 박사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의 내면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교정을 하면, 그에 따라 전체 우주가 창조주에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스스로를 교정해야 할 뿐이다. 상승해가는 인간은 그와 함께 전 세계들을 데려올라 간다. 그래서 모든 세계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에 또 함께해주세요. 우리는 영적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기본 도구인 스크린 만들기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주의 생각을 느껴서 창조주와 형태의 동일성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감지기랍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창조주와 창조물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창조주는 또한 “빛”이라 불리고, 창조물은 또한 “그릇”이라 불린다. 창조주 고유의 성질은 베푸려는 의지이고, 창조물 고유의 성질은 받으려는 의지이다.
- 창조는 다섯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 베히나 쇼레쉬 (뿌리 단계): 창조주의 의도는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것을 완벽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의 생각”이라 일컬어진다.
- 베히나 알레프 (단계 1): 창조주(빛, 베푸려는 의지)와 창조물(그릇, 받으려는 의지)가 완벽한 유착 속에 있음.
- 베히나 벳 (단계2): 받는 것보다는 창조주처럼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해하여, 창조주가 주는 기쁨을 받지 않으려는 피조물의 결정
- 베히나 기멜 (단계3): 창조주에게 베풀기 위하여 창조주가 주는 기쁨을 조금만 받으려는 피조물의 결정. 그 본성 안에 받는자가 되게끔 인쇄되어 있기에 피조물은 창조주처럼 순수하게 주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이해하고 이런 결정을 하게 됨.
- 베히나 달렛 (단계4): 피조물을 위하여 최초에 의도된 바가 그러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주려고 하는 모든 기쁨을 받으려는 피조물의 결정.
발달의 동력과 고통의 의미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다시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이전 수업에서 우리는 현실의 청사진, 창조의 생각, 창조주의 행동, 상위 세계의 본질 및 영성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이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이 피조물을 무한한 기쁨으로 채운다는 것이며, 이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유일한 이유이고,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은 이것의 결과입니다. 모든 일은 이 창조의 생각에서 오고, 그 창조의 생각을 실행하는 도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본질을 이해하고 말고에 상관없이요. 이것이 우리가 가진 문제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리고 삶에 대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질문이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느끼기란 불가능하며, 그래서 이런 자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창조주가 완벽하게 선하고, 선만을 행한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악이 보일까? 왜 나쁜 일들이 존재할까?”
이 물음을 검토하기 위해서 카발리스트들은 우리에게 경계선을 그어 놓았는데요, 우리가 혼돈없이 진실한 해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연구 방법에 대한 경계선입니다.
바알 하술람 말씀에 카발라에 다음과 같은 법칙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습득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이 붙을 수 없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창조주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이지, 어떤 아이디어나 어떤 종류의 지능화가 아닙니다. 지능화 속에는 진정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 자신있게 느낄 수 없지요. 당신 앞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듯이, 혹은 당신 두 다리가 서 있는 곳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내면에서 느끼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것은 느껴져야만 합니다. 아이디어나 추상적 개념 속이 아니라 오직 인식 내에서만 참다운 변화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데요, 우리가 현실의 절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절반, 그가 나쁘다고 간주하는 일들을 인간은 부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내적 프로그램 때문인데요, 이는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그 받으려는 의지는 시스템의 안내서 역할을 하지요. 즉, 그것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우리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선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우리를 끌어 당기거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 것, 우리에게 공허함을 주는 것으로부터 도망쳐서 멀리 달아나게 합니다.
우리들은 지속적으로 좋게 여겨지는 것들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두 종류의 사건들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그릇된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전체 그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언제나 그림의 작은 한 부분에만 촛점이 맞춰지지요. 우리는 문제 자체의 수준 내에서 그림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식이 대조의 결과로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뜨거움이라는 정반대의 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차가움을 알지요. 내리막에 연관시킬 때만 오르막을 이해하구요. 만약 뜨거움 그 자체의 본질만을 바라본다면, 그에 반대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정반대의 본질이 없었다면, 그것은 어떤 요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겠지요. 만약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떤 것을 측정할 길이 없었다면, 뜨거움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테죠. 단순히 감각이 없었을 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으로 간주하는 것, 또 우리가 그것을 선으로 간주하는 이유와 우리가 나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또 그 이유를 비교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잣대의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거죠. 더 큰 현실의 영역과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받으려는 의지에서 오는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잣대는 전부 다 완전히 주관적입니다. 그건 전적으로 슬라이딩 스케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건들이 우리에게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깊이 검토해 보면, 당신의 진실한 반응을 검토하려 한다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습득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이 붙을 수 없다.”인데요, 당신은 그 실제 경험을 검토해야 합니다.
쓰나미 대참사를 예로 들어 보세요. 40만 명이 그 참사로 숨을 거두었고, 이것이 비참하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테죠. 생명을 잃은 것은 끔찍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끔찍하고요. 이것은 거의 상상조차 불가능한 정도의 대형 참사, 악이죠.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지역을 재개발할 기회를 얻은 기업의 소유주 가운데 한명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에게 지난 5년간 발생한 일 중 최고일테죠. 그럴 때, 실제로 당신은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당신 아이디어에 따라서 “이것에 관해서는 이런 식으로 느껴야만 해.”라고 하면서, 선한 것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것이고, 악한 것에 대한 아이디어는 저것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당신이 실제로 느끼는 바대로 따라야합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어떤 잣대로 잰다면 당신은 가상의 무엇을 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위의 생명의 수준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나쁜 일로 생각지 않다가 나중에는 좋은 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사실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산불과 같은 경우를 보면, 우리는 엄청난 피해가 입혀진 것을 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나무들에게 해가 되었지만, 크게 보면 이 일이 일어난 목적이 있지요. 앞으로는 더 무성한 숲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풍성한 숲, 더 건강한 숲이 생길 것입니다. 숲이 잘 성장하게 방해했던 것들이 이제는 변화했습니다. 재난을 좋은 일로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한 과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위에 존재하는 생존 단계를 보며 더 큰 발달의 곡선을 이해하게 되지요.
우리 하위에는 무생물 수준, 식물 수준, 동물 수준이 존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수준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 인간 수준은 그저 복잡한 동물 단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프로그램과 무의식적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더 큰 범위에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요, 그저 어떤 한 단면을 보는 것이 아니구요. 그걸로는 일의 계획이나 진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알 수 없어요. 인간 수준에서 이 단면만 본다면 이해 불가능하죠. 어떤 상위의 수준으로 우리 자신의 머리를 끌어 올릴 수는 없어요. 더 상위의 단계에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며,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말하는 단계”라 부릅니다
인간의 “말하는 단계”야 말로 우리가 상위의 체계의 한 부분이 되기 시작하여 창조주가 이끌어 가는 전체 체계를 이해하게 되는 단계지요. 우리를 좋은 것 쪽으로 끌어당기고 나쁜 것으로부터 밀어내는 받으려는 의지를 통하여 우리를 움직이는 유일한 힘이 창조주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단계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삶 속의 사건들을 분리된 덩어리들로 보고,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을 실제로 알지도 못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것들을 끼워맞추려 하는 노력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이 상위의 상태 속에 우리들 스스로를 들여놓는 일이 가능해질까요? 어떻게 이 상위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까요? 사실은 우리들이 그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상위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의 도움으로 그것이 가능해지며, 그럴 때 우리는 그것에 닮을 수 있습니다.
진화의 힘은 욕구의 발달과 같다는 것과 이 상위의 빛이라는 체계는 우리가 이들 욕구들을 따라 움직여서 올바른 것을 원하게 될 때까지 오도록 조정해왔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발달에 우리들이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참여해왔지요. 어떤 사람 내면에 자각이 일어나는 때가 될 때까지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여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지대로 이를 계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각성은 우리가 선하고 악하다고 부르는 사건들에 의해 조정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욕구들은 계속해서 진화되고 변화하여 우리의 물음이 더 커집니다. 우리가 역경이라고 여기는 이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수준에서 그 물음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고통을 야기시키는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왜 고통받고 있으며 어떻게 고통을 멈출 수 있을까?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 이 발달의 동력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움직여갑니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오직 상위의 단계에서만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위의 단계가 시스템을 이끌어가고, 좋고 나쁜 사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도록 만듭니다.
사람의 감각 안에 이 의식적이고 실체적인 욕구가 발생하였기에 다른 어떤 욕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 이 의식적이고 실체적인 욕구 뿐이지요. 이제 그 해답은 갈 곳이 생겼지요. 사람이 그것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어요. 그러나 우리 고통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슬라이딩 스케일에 빗대지 않고 그것을 느끼거나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요. 그것은 받으려는 의지에서 올 수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은 창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기만 하지요. 그건 무조건적인 베품이고, 피조물의 본질은 받는 것, 자기 혼자만을 위해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이 두가지 간의 차이를 측정함으로써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느끼기 시작합니다. 느끼고 감지하도록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그것을 감지하는지가 관건입니다. 나는 그것을 무엇처럼 느낄까요?
우리들은 빛의 바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들은 항상 우리 그릇(클리) 안에, 기쁨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상위의 빛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채워주고 있어요. 즉, 빛 그 자체에 대한 느낌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창조주인 것이죠.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거기에 어떤 옷을 입히는지, 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우리에게 달렸지만 말이죠.
우리 삶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곧바른 빛으로 느끼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식으로 느끼면, 우리는 그것들을 받으려는 의지를 통해서 느낀다는 뜻이고, 그것들이 주어진 이유를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그것 속의 생각을 느끼는 일입니다. 이처럼요. 여기 이 본질은 무엇인가? 이 사건을 우리에게 주는 배후에 있는 창조주의 의도, 즉 베품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를 충족으로 이끄는 발달의 동력과 이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때 우리는 그 사건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창조주가 옳다고 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바른 사람, 짜딕(히브루어)입니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 사건을 제공하는 배후의 생각, 창조주가 이끄는 자비로운 힘을 느끼는 사람이 짜딕입니다. 우리 클리 속에 우리가 느끼는 바와 창조주의 생각의 차이 즉, 창조주의 생각에 비교한 우리의 생각, 이것이 바로 고통의 근원입니다.
나의 본성, 즉 빛을 받으려는 나의 의도와 빛을 주려는 창조주의 의도 사이의 차이가, 이 불일치함이 나에게 불편함, 고통 등을 야기시킵니다. 이 베품의 본질, 즉 상위의 빛을 주려는 본질은 우주 일반의 법칙이고, 우주의 모든 것은 그것을 따릅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이를 따르죠. 모든 생명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내면에 존재하는 것 사이의 균형, 항상성을 찾을 의무가 있어요. 그러므로 삶에서 이 법칙을 지키지 않는 만치, 즉 그 법칙과 닮지 않는 만큼, 우리 세상은 물론 모든 국면에서 고통스러워 집니다. 단지 인간 뿐만이 아니라, 주위 모든 것들-세상, 국가, 가족, 모든 현실이 고통을 받지요.
상위의 빛을 끌어 당겨 창조주를 이해하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서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카발라 텍스트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카발라 텍스트를 공부하는 유일한 이유는 교정하는 빛을 끌어당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지적인 앎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한 것이죠.
우리가 텍스트를 읽어나갈 때 여러분의 물음을 끄집어 내세요. 여러분이 가장 알고 싶은 것, 그것을 기억하였다가 읽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겁니다. 지적으로 무엇을 이해하든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여러분이 원하고 느끼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 글은 “그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이며, 이는 바알 하술람께서 말씀하신 것을 아들인 라바쉬가 녹음한 것입니다.
씌여 있기를, “그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뜻은 이 세상에는 그에 반해 어떤 것을 할 능력이 있는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보기에, 즉, 상위의 왕실을 부인하는 만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좋고 나쁜 사건들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어떤 체계를 보게끔 고의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선에 반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느낍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게 막는 어떤 것이 있다고 느끼지요. 그 이유는 상위의 힘 자체가 이렇게 되도록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목적이 있지요. 상위의 힘의 뜻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만들 수 있는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교정으로 간주된다, 일컬어 “왼쪽은 밀어내고 오른쪽은 가까이 한다,” 그 뜻은 왼쪽이 밀어내는 것이 교정으로 간주된다. 즉, 시초부터 사람을 옳은 길에서 전환시킬 목적으로 온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이것들이 그 사람을 성스러움에서 밀어낸다.
이 말씀은 창조주를 직접적으로 느끼기 불가능한 이 경험, 이 힘이 우리를 멀리 밀어내는 것 같은 이 느낌, 이것이 “교정”이라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이는 이 체계의 부분이죠. 그것을 일컬어, ‘왼쪽은 밀어 내고, 오른쪽은 가까이 한다’라 합니다. 즉 창조주에 가깝게 끌어당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를 느끼기를 원하는 사람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삶의 일반적 사건들이 아니라요. 비록 그것들이 같은 구조로 되어있지만요. 모든 자연의 단계들은 똑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는 시초부터 사람을 옳은 길에서 전환시킬 목적으로 온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이것들이 그 사람을 성스러움에서 밀어낸다.” 그 말은 어떤 사람이 창조주에 대한 느낌, 삶을 지배하는 법칙, 성스러움을 맛보려 한다면, 그것은 케두샤이며, 이는 분리됨, 떨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그 케두샤의 본질은 베푸려는 의지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요. 완전히 이 세상 위에 존재하죠. 그러니까 이 체계 속에는 의도적으로 사람이 성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멀어짐의 혜택은 그것들을 통해서 사람은 신의 도움에 대한 완전한 욕구와 필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욕구가 존재하면, 즉 창조주를 알려는 의도가 존재하면, 이 밀어 냄은 우리가 전체 자연 체계에서 보아온 것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필요를 야기시키는 것이죠. 이는 어떤 특정 필요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자동차, 부, 음식, 성, 지식, 권력 등의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필요가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필요를 의미합니다.
…이 멀어짐의 혜택은 그것들을 통해서 사람은 신의 도움에 대한 완전한 욕구와 필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욕구는 직접적으로 신을 향한 욕구, 직접적으로 신에 대한 욕구(히브루어로는 야사르 케엘), 직접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을 향한 욕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길을 잃어버림을 알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지도하는 상위의 힘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의 수행에서 발전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는 것을 알게된다.
말하자면, 이것을 원하면 원할 수록, 빛은 사람의 내적 상황과 빛의 상태 간의 차이를 더욱 더 드러냅니다. 이것이 “악의 적발”이라 불립니다. 왜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할까요?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잣대가 되기 때문이죠. 대조에 의해서만 우리는 어떤 것을 알게되니까요.
우리는 사랑의 거대함과 창조의 생각의 완벽함을 우리의 장벽에 빗대어 측정합니다. 그 장벽 내에서 우리 자신들의 본성을 감지하기 시작하지요. 그러므로 이 대조의 과정을 통해서 창조주와 상위 세계의 본성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본성 또한 드러납니다. 받으려는 욕구가 자라면 자랄 수록, 특히 창조주와의 연결을 받으려는 욕구가 자랄 수록, 더욱 더 큰 창조주의 느낌이 그 욕구를 채울 수 있어요.
그의 수행에서 발전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 말해, 그와 창조주 간의 차이를 알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에게는 겉으로만이라도 토라와 미쯔봇을 지킬 힘이 부족하다. 즉, 창조주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창조주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이유에서 그것을 행한다고 자신을 속이는 일조차 불가능해집니다. 사람들은 차이의 정도가 가장 심하다고 느끼죠, 그러나 이것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받으려는 의지의 확대와 그것의 교정에 의해서 실제로 우리가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장애물들을 참으로 극복함으로써, 지식 이상으로, 그는 토라와 미쯔봇을 지킬 수 있다. 힘에 의해서, 지식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사고나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빛을 실제로 받음으로써 그것이 가능합니다. 빛은 지식 너머에 존재할 수 밖에 없어요. 받으려는 의지 및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는 방법에 관련된 모든 생각 너머에서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
우리가 선하고 악한 일들로 경험하는 이 힘은 창조주의 왼쪽과 오른쪽 손으로, 그것이 우리 삶의 일상적 일들을 통하여 오르막과 내리막이란 수단을 이용해 우리를 안내합니다. 일단 우리에게 신에게 곧바로 가려는 이 욕구가 있으면 이것이 올바르게 이해됩니다.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이 특별한 욕구는 발달을 하고, 결과적으로 가상 세계 전체를 에워싸서 들이켜버린 후 우리를 현실과 완벽하게 연결시켜 줍니다
카발라 글의 아름다움을 그저 맛만 보았습니다. 이들 글들과 카발라 안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탐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무한한 기쁨으로 그것을 채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진화를 이끄는 힘이다. 우리들은 오직 한가지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완벽하고 영원한 상태에 이르려는 목적이다.
- 우리는 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에서 달아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고유의 본성이다.
-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우리 발달에 필요한 단계이다.
- 고통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을 묻도록 하는데 있다.
- 고통의 원인은 우리 고유의 본성(이기심)이 그것을 창조한 본성(이타심)에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 이 원인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들은 삶의 발달 과정 속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게 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통과 재앙의 파도가 치기 전에 발달할 수 있으며, 우리 발달을 가속화하여 여러 겁의 생에 걸쳐 이룰 발달을 하루만에 완성시킬 수 있다. 한펴느 그와 동시에 우리 고유의 이기적인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고통의 길&토라와 미쯔봇의 길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잘 오셨습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발달의 동력, 욕구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발달의 길에 따라 현실이 우리를 움직이는 법을 알아 보았습니다. 상위 세계, 영적 세계를 정의하는 본질과 물질 세계를 정의내리는 본질을 검토했고, 영적 세계는 우리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더 큰 현실이라고 우리가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지요.
우리는 욕구의 진화에 대해서도 논했습니다. 살펴본 바로는 육체적이라 간주되는 욕구는 네가지로 나누어지고,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무한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창조주가 즐겁다고 정하는 것에 의해 진화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생각에서 시작된 진화의 전 과정은 결여와 충족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욕구는 단순한 욕구(성, 은신처, 음식, 가정에 대한 동물적 욕구) 에서 발달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채워질 때, 우리는 더 큰 욕구로 옮아가지요. 그것은 부에 대한 욕구이고, 이는 첫번째 욕구의 축척입니다. 그 욕구가 우리에게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전히 무언가가 우리를 몰아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죠. 그것은 우리를 앞으로 밀고 당깁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떤 맛, 우리가 소유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향해 전진하지만, 일단 그것을 가지고 나면 더이상 그 맛을 볼 수 없죠.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진화의 힘입니다. 그 다음에는 부에서 명성과 권력으로 옮아갑니다. 일단 그것을 충족시키고 나면 우리의 공허함은 지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지식이 공허하다고 느끼면 이 세상 무엇도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되새겨보면 그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발전이 가능해졌지요.
고통의 길& 토라와 미쯔봇의 길
[토니 코즈넥]
그 독특한 욕구가 영적인 것에서, 즉 베푸려는 의지라는 본질에서, 가슴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인간 가슴 내면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 버립니다. 카발라에서 “가슴”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는 어떤 사람이 가진 모든 욕구의 총합을 뜻하는 데요, 인간의 가슴은 물질 세계에서 오는 욕구들로 아직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들은 카테고리 일, 이, 삼, 사에서 온 것들이죠.
영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욕구인 이 욕구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며, 이는 두 단어의 히브루어에서 옵니다. 이는 “곧바른”을 뜻하는 야사르와 “신”을 뜻하는 엘이 합해진 것으로 신과의 직접적 연결을 원하는 욕구입니다. 반면 육체적인 욕구들은 “국가들”, “세계의 국가들” 이라고 불리며, 이는 물질 세계의 욕구들을 가리킵니다.
여기까지는, 즉 물질 세계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실제로 느낄 필요가 있는 시점에 오기까지는, 발달의 동력, 그러니까 욕구가 우리를 움직인 방법은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지요. 그러나 지금부터 그것이 의식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슴 속의 이 점은 영적인 유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의 태아와 같지요. 영혼은 욕구의 한 종류이고 그것은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가슴은 이 욕구로 가득 차야 합니다. 육체적 욕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모든 구석을 메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욕구들은 변화, 교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죠. 오직 이들 욕구들을 교정함으로써 신에게 직접적으로 가려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본래 상태에서, 우리 영혼의 기원에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로 창조주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것이 창조에 존재하는 유일한 두가지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죠.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존재로, 하나의 단일된 피조물로 창조주에게 붙어 있었어요. 그러나 피조물을 창조하여 기쁨으로 채운다는 창조의 생각 때문에 그것은 오직 출발점이었고, 그것이 시스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받으려는 욕구인 이 피조물의 본질은 의도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고, 이 본질, 나 스스로만을 위해 받으려는 욕구가 확대된 결과 창조주의 본질(베품)과 피조물의 본질(받음) 사이에 더욱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기적인 의도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최초의 피조물이자, 전체 피조물이며, “아담 하 리숀”(최초의 인간이란 뜻)이라 불리는 집단 영혼은 세계들이라는 시스템을 거쳐서 하강했지요. 125 단계를 거쳐서 점점 더 큰 이기심에 가까워져 마침내 그 영혼이 소위 육체 중심주의로 분리되는 어느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즉, 그 집단 영혼은 육십만개의 부분으로 흩어졌고, 각 부분은 본래 영혼의 한 조각을, 즉 이들 각 부분들은 한 욕구를 소유하게 되었지요. 과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건 아직 중간점일 뿐이지만) 이 부서져 흩어진 집단 영혼 속에서 우리는 고립과 분리, 서로를 향한 적대감, 서로를 착취하려는 욕구 및 물질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합니다. 이는 중간점일 뿐이고 집단 영혼은 교정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계들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창조주와의 하나되는 이 상태로 되올라갈 것입니다. 물론 한번에 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고의로 집단 영혼이 육십만개의 부분으로 부서진 것입니다
각 부분들은 613가지 욕구로 또다시 부서졌습니다. 즉, 아담 하 리숀 내의 각 개별 욕구는 교정이 가능한 613가지 욕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들은 충분히 작습니다. 마치 거대한 보물을 나누어 각 개인에게 동전 한푼을 주는 것과 같아요. 각 개인들이 이 베품의 자질을 되돌려 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 가슴 속의 한 점이 그 근원으로 그 한 점을 되돌려 와서, 한 집단으로서 다시 한번 그 보물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신뢰를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욕구를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의 한 점 내에서, 창조주의 보물함에서 온 이 동전과 가슴 속에 존재하는 612가지 다른 욕구들은 조금씩 변화되어 창조주의 본질에 더욱 더 닮아가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뒤집기 위해서 말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정(틱쿤), 변화, 창조의 생각의 충족이라는 되돌아감의 이 과정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들 모두, 그러니까 육십만개의 집단 영혼의 모든 조각들은 재결합하고 육체적 이기적 인식과 고통의 세계에서 상승하여 완벽하고 전체적인 상호 관계 속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주와 하나됨이라는 우리는 창조의 목표에 이르고, 이 가장 크고 무한한 욕구에 대한 완전한 충족을 이룰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은, “그것이 우리 동의 하에 의식적으로 전개될 것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인가?” 입니다.
우리에게 목표는 하나이고 그 목표는 확정되어 있으나, 목표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고통의 길”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토라와 미쯔봇의 길”이라 불립니다.
고통의 길은 우리들 모두가 이미 가고 있는 길이지요. 그건 실제로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느리고 애타는 인류의 진화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 특징에, 우리의 육체적 인식 방법에 연연하는 일종의 매달림입니다. 그 발달 과정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한 결과 우리는 사건들에 의해 강요당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대참사, 쓰나미를 목격하고, 전쟁들을 봅니다. 생에서 개인적인 경험도 합니다. 욕구의 발달 과정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참여하여 욕구를 교정하지 않기 때문에 야기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습니다. 이 길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으며, 그것은 비참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일단 가슴 속의 한 점이 나타나면, 그것은 의식적인 참여가 되고 이것이 토라와 미쯔봇의 길입니다. .
토라는 “빛에 의한 소개”를 뜻하고, 미쯔봇은 613개의 욕구 중의 한 욕구의 본질이 이기적인 것에서 이타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매 사건은 사실상 미쯔바(미쯔봇의 단수), 즉 우리에게 주어진 변화의 기회입니다. 제가 미쯔바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받는 그런 육체적 계율을 뜻하지 않아요. 유대인 식탁 법률인 슐한 아루흐 등에서 이같은 것들에 대한 리스트가 있습니다. ‘이 육체적 사항을 지금 행하라’는 식으로요. 그런 육체적 사항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적 교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욕구에 대한 교정이지요. 그러므로 당신이 그 외적으로 선행을 하더라도-종교적인 선행이든 혹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든 상관없이- 어떤 외적인 행위를 할 수는 있지만 당신은 미움과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행위로는 아무것도 잴 수 없어요. 우리는 613가지 욕구 중 하나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사건으로서 말이죠.
이 발달 과정에 의해 우리의 전 생애는 그런 식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를 위해 받으려는 욕구로서 우리가 우선 느끼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창조주의 생각을 이해하려 시도하며 그것을 이타적인 형태로 변환시킬 기회를 제공하지요. 내게 그 상황을 주는 배후의 생각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듯, 영적 차원에서 우리가 진화하는 유일한 길은 내면의 본질을 변화시켜 내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영성 속의 본질에 닮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욕구에 따라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것은 나는 창조주를 알고 싶다는 것이죠. 즉 직접적인 느낌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 욕구들 속에서, 내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일들 속에서 그 분의 생각, 상위의 그 분, 내게 이 완벽하고 체계화된 상황을 부여한 상위의 단계의 생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 상위의 단계는 내게 이 기회를 부여했지요. 마치 생일 선물처럼, 우선 그 부패한 형태 자체로 내게 가지게 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보고 분석함으로써 그 배후의 그 분의 생각을 느끼는 것, 그것이 미쯔바이고, 그것이 틱쿤이며, 그것이 변화입니다.
우리는 125 단계에 걸쳐서 완벽한 현실과 상호 연결에서 개인과 개인적 욕구라는 현재의 분리된 상태로 하강하였는데요, 이들 125 단계들 또한 이 613 가지 미쯔봇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변화라는 교정이 수행자를 사다리 꼭대기까지 데려올라 갈 것입니다.
각각의 하강의 단계는 우리들 내에 유전자로서 남아있는 것이 특색입니다. 받으려는 의지의 강도가 점점 더 보태질 때마다 길에 뿌려진 빵가루처럼 그 기억이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이 가슴 속 한 점은 최초의 영적 유전자로서 우리에게 상승의 가능성을 주며, 이는 “레쉬못”이라 불리는 영적 유전적 특징이란 사슬의 시작점이지요. 레쉬못은 기억들이고,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며, 이것이 받으려는 의지의 613가지 변화와 베푸려는 의지(우리를 창조주에 이어주는 것) 사이에 다리를 놓아줍니다. 매 사건이 우리를 위해 완벽한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챌 기회를 가집니다.
교정과 변화라는 이 행위, 틱쿤은 우리들에 의한 것이 아님에 주목합시다. 영적인 빛과 우리가 접속을 해야 하는 욕구의 결과로 틱쿤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의 결과로서 빛이 그 작업을 해주는 것이지요. 그것은 둘러싸는 빛에 의해 우리에게 되어진 행위입니다
조하르에서는 “어떤 이가 자신을 정화하러 올 때, 그는 천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즉, 네가지 육체적 욕구들이 변화되어 베품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더 큰 욕구가 생기게 된 것은 거기에 사용된 중요한 욕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혼자서 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 작업은 “신의 일”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우리가 훌륭한 군인들처럼 밖으로 나아가 신이 내려준 일을 마무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확대된 욕구의 결과로서 변화, 정화, 틱쿤이라는 작업 자체가 빛에 의해 우리에게 행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빛”이라는 단어에 혼돈하지 마세요. 그것을 물리적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적 세계에서 본질은 속성의 본질임을 기억하십시요. 그것은 의도, 감각적 상태의 본질입니다.
만약 당신의 의도와 빛의 의도 사이의 차이를 느끼고 싶다면, 우리가 물질 세상에서 그렇게 하듯이 단순히 우리에게 어떤 욕구가 있어서 그것을 곧바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상태와 빛의 상태 간의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즉 나의 의도와 빛의 의도 사이의 차이죠, 빛을 감지할 수 있는 어떤 것, 감각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감각 장치는 어떤 의도여야 합니다. 그것은 “장막”이라 불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가적 감각, 식스 센스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이 장막은 공진기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보내주는 욕구 사이의 대비점입니다. 빛에 의해 주어진 것이죠. 그것이 곧바로 안에 들어가는 대신, 이 장막에 부딛혀 어떤 느낌을 야기시키죠. 이 의도와 여기 이 의도 사이의 차이에 대한 느낌말입니다. 이 장막, 혹은 마사흐(히브루)가 도구입니다. 우리 작업에 사용할 유일한 도구이자 우리의 구성요소인 받으려는 의지를 매우 다른 어떤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이 이것입니다. 오직 영적 세계의 의도에 맞는 의도에 따라서만 빛을 받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해 나중에 더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즉, 여기 이 안의 느낌이, 장막 안의 의도가 빛 속의 의도와 동일하다면요. 이것은 “교정된 욕구”라고 불립니다. 이 차이가 우리 내면에 어떤 필요, 올바른 필요, 특정 필요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특정 방향으로 부족함을 창조하지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없는 것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를 만듭니다. 즉 빛, 빛 배후의 생각과 의도에 대한 느낌을 갈망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큰 교정을 이루어가는 의도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욕구가 그 부패한 형태에서 그것의 완벽화된 형태로, 즉 받으려는 의지에서 베푸려는 의지로 변화를 할 때마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에 접속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점점 더 전체 과정 배후의 생각에 연결시킵니다. 이 한 특정 욕구에만, 오직 한 개인에게만 그것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담 하 리숀 속의 상호 연결의 결과로서 사람1의 부분, 즉 사람1 내의 욕구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다른 모든 욕구들 속에서 교정이 되고 그 욕구들을 재결합시킵니다.
그래서 그것이 교정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승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실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 그 배후의 생각,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건 말건 간에 이것이 변화합니다. 전체 시스템 배후에 존재하는 완전한 선을 느끼는 것이 가능해져서 선과 악에 대한 물질적 사고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됩니다.
그 과정 배후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깨달음입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좋고 나쁜 사건들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우리가 일어나기를 원하는 일들과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일들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옳은 일을 하거나 그릇된 일을 한다는 느낌, 어떤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느낌, 현실에는 선한 힘과 악한 힘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받으려는 의지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든지 그것 배후에 있는 진실한 한결같은 생각 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다음 시간에 함께하셔서 발달의 동력 및 고통의 원인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검토해 봅시다.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우리의 본래 상태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와 형태의 동등함에 존재하며, 무한한 충족과 영원함 및 완벽함을 경험한다.
- 우리는 우리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 가도록 예정되어 있으며, 거기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1)고통의 길 (2) 빛과 변화의 길
- 고통의 길은 우리의 무의식적 발달이다. 인류의 전 역사는 이 고통의 길을 거쳤고, 우리가 어떻게 발달되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고통의 길에서 우리는 인식의 결여로, 우리를 안내하는 그 힘과 같아지지 못하기에 고통을 경험한다.
- 빛의 길을 따를 때, 우리의 본성과 우리를 안내하는 그 힘의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고통을 넘어서 기쁨의 원천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이 힘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현실 인식하기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다시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첫번째 수업에서 우리는 카발라와 카발라가 아닌 것을 간략히 살펴보았지요. 카발라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보면, 그것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봅시다. 우선 카발라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여, 그 뜻하는 바를 살펴본 후 우리가 무엇을 이해할지 보겠습니다.
카발라는 인간, 사람으로 하여금 상위의 현실을 느끼고 이해하게 해주는 과학이자, 지혜입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말하는 삶의 목적인데요, 물론 여기에는 몇가지 의문이 따릅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상위의 현실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상위의 현실을 느끼고, 이해하며, 그 현실에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
여러분들이 기억하신다면, 이전에 이 그림을 살펴보았는데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그러니까 무제한적인, 완전하고 전체적인 현실 내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 삶이 전개되는 것이 보이지요.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상호 연결되어 있고, 끝없는 즐거움과 완전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으며,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접속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체 체계에 도달했던 사람들인 카발리스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런 존재 방식에서, 이런 방식을 거쳐서, “세계들”이라 불리는 시스템을 통하여 하강했다고 합니다. 세계들은 올라밈 이고, 히브루어의 올람의 복수로, 그 근언은 “숨다” “숨겨짐”이란 의미의 헤엘람에서 유래합니다. 우리들은 현실과의 이 완전한 결합에서 하강하여, 장벽이라 불리는 교차점인 이 곳을 지나서, “우리 세계”라고 불리는 한 장소, 여기에서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이 전개됩니다. 우리 세계는 이 모든 영적 세계들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이것이 물질 세계 혹은 유형으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삶의 목적, 당신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면, 그 계획에 대해 안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그건 마치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거의 개그의 소재가 되겠지만, 카발리스트들은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이 전체 현실에 도달한 사람들에 따르면 현실의 모든 것, 모든 창조된 것에는 계획, 즉 청사진이 존재합니다. 그들 말씀에 삶의 목적이란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우는 것,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현재 발생 가능하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의 전적인 의미이고, 목적이며, 방향입니다. 오직 그 목적 뿐입니다. 그 사고 속에, 그 의도 안에, 창조의 모든 것 배후에 존재하는 그 생각 내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일에 대한 모든 규율이 정해졌습니다. 영적, 물질적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기본 법칙들은 그 한 생각에서 발단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가져오려는 이유에서 발생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영적 세계 밖에 존재하게 만드나요?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글쎄요, 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 즉 우리가 현실을 인지하는 방법이 우리를 가두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
이것이 어떤 사람, 다섯개의 구멍을 가진 닫힌 상자입니다. 이 다섯 개구는 우리의 오감입니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상위의 현실, 완벽한 현실, 영적이며, 그 완벽한 현실에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것이 바로 외부의 현실로 보여지는 것이고, 그 형태가 잡히지 않은 어떤 종류의 것이 사람에게 다가오면, 우리가 가진 오감을 이용하여 그것이 무엇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나의 감각에 따라서 현실이 무엇으로 구성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죠.
이 영적인 대상이 상자에 접근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사실상 상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상자는 어떤 밀폐된 시스템인 것이, 이 대상이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장벽에 부딛칩니다. 그 장벽은 어떤 종류의 변환기인데요, 마치 고막 혹은 망막 혹은 피부나 미뢰의 표면에 있는 신경과 같지요. 외부의 이것을 들여오는 대신 이것이 환원되어 어떤 프로그램을 거쳐갑니다. 여기 이것요. 그것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감으로써 프로그램 내부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단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것은 우리 상자 혹은 이 기계를 떠나가고, 그것이 산출하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림 계속됨]
이 감지기가 얼마나 민감한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이것이 눈이라고 가정합시다. 그것이 허블 망원경이든 당신이 완전한 근시여서 당신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어도 상관없어요. 민감한 정도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작성이고, 이 주관적 시스템 내에서, 이 기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든지, 이 프로그램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될 뿐이죠. 이것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이 이해가능한 환원말입니다
이것을 제한하는 이 프로그램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객관적 현실이고, 이것이 우리가 인지하는 그 현실의 한정된 부분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기심”이라 불립니다. 그것은 자아 근심이지요. “그 안에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이지?” “이것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미칠까?”라는. 이 결과로 나는, 그 개인은 이 모든 주관적인 관점 속에 갇혀버립니다. 오직 그 상자 내부에서 느껴지는 방식과 관련된 관점이지요.
우리가 가진 문제는 우리의 오감 모두는 그와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는 데 있어요. 오감 가운데 하나도 그 프로그램 외부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더 큰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서 우리는 부가적인 감각을 하나 발달시킬 필요가 있어요.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식스 센스”라고 부릅니다. 운세를 말해 주는 사람의 식스 센스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것에 실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감각으로, 그 같은 프로그램 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당신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이 있나?”라는 것에 만족하는 한 외부에서 작용하기, 즉 이 상자 밖에서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창조의 생각은 사람에게 이와 같은 완전한 충족감을 가져다 주는 법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상자 밖으로 나오려는 필요를 느끼도록 만드는 어떤 의욕적인 힘이 존재합니다. 우리들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이 안에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자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나 그건 괜찮습니다. 왜냐하면이 충족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는 법, 그것을 동력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창조의 생각이 우리에게 부여한 발달의 원동력을 이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현실에서 모든 것을 작동시킬까요? 모든 일들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것이 내적인 일이든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영적인 일이든지 말이죠. 발생하는 모든 일은 오직 무언가의 결과로 일어나는데요.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당신은 거기에 앉아있죠. 당신은 의자를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당신 눈도 그것을 쫓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당신은 음료수를 집어 들었을지도 몰르죠. 지금 당신이 연루되어 있는 어떤 움직이든지 그것은 오직 어떤 계산의 결과로 발생합니다. 그 계산이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불편함을 느껴서, 당신 내에서 어떤 필요가 발단하여, 나타났기에, 당신은 새로운 위치나 새로운 상황으로 움직였지요. 당신은 그 새로운 상황이 이전의 상황보다 더 큰 기쁨을 주리라고 믿고 있지요.
기쁨의 결여와 충족, 그리고 욕구라는 힘이 현실 속 모든 것에 동기를 부여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우리를 이 육체적 세상 밖으로 빼낼 것입니다. 물질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우리가 경험하는 한계들, 그리고 그에 동반되는 고통 너머로 말이죠. 제대로 이용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 장벽을 너머 이 길로 영적 세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기 시작함]
우리 모두는 욕구를 느끼고 그것이 변화함을 느끼지만, 날 때부터 우리 내면에 설정된 이 시스템에 사실상 신경을 안써서 그 시스템이 우리에게 어떻게 유용한지 이해를 못합니다. 기쁨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첫 생각은 그저 생존유형의 기쁨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간주하고 필요로하는 첫번째 카테고리에는 성, 음식, 은신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 우리의 직업, 우리 주위에서 습득하는 것, 우리 삶의 전체적 목표는 이들을 찾고 얻는데 있으며, 이 욕구는 인간과 동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이 욕구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관되지 않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이것이 필요할 뿐이죠.
일단 이 욕구가 채워지면, 삶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그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두번째 카테고리의 욕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부에 대한 욕구입니다. 부는 첫번째 카테고리의 축척을 말하죠. 난 다시는 그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거죠. 일단 부에 대한 이 욕구를 채우고 나면, “이것이 전부일까?”라는 느낌이 들면서 다른 어떤 것이 우리 안에 자라나지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것은 단순히 또 다른 욕구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욕구죠. 그 이전의 욕구를 포함하는 그런 욕구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우리에겐 작은 욕구와 작은 만족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우리에겐 커진 욕구가 존재하고 그것은 더 큰 충만을 필요로합니다. 이것이 이것에 통합된 것이죠. 이제 부로서 충족이 안될 때는 새로운 욕구가 내 속에서 올라오며 그것은 권력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는 단순히 개개인들의 삶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역사상 전 인류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전체 역사는 이들 욕구들의 진화였던 것이지요. 권력은 이것과 이것 둘다를 지배하고, 가장 거대한 축척을 가져다줄 모든 시스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권력이고, 이것이 절대 지배권이고, 이것이 내 직업에서의 지배력입니다. 일단 그것을 가지면, 더 이상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나는 공허해집니다. 나는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네번째 욕구가 내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대한 훨씬 더 확장된 욕구, 지식에 대한 욕구입니다.
지식은 우리가 물질적 세계라고 정의하는 것의 일종의 장벽이죠. 이들 하나, 둘, 셋, 네가지 욕구들은 모두 우리가 기쁨이라 인식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채워지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며, 우리를 만족시켜줄 것이지요. 이를테면 지식은 과학이고, 종교이며, 예술이죠. 인류가 성취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마지막에 지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위대한 욕구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그 욕구를 채우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욕구 또한 공허하다는 것을 결국 발견합니다. 과학에는 사태의 실질적 원인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을요. 과학에는 목적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계적인 해답 뿐이지요. 이들 욕구들과 관련된 해답들 뿐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믿음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직접적 지식에 접근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이 욕구가 충족된 결과로 어떤 사람이 공허해지면 아주 다른, 매우 특별한 일이 생깁니다. 새로운 욕구가 눈을 뜹니다. 그러나 이 욕구는 이 세상의 욕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욕구입니다. 가슴이란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욕구들의 총합체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욕구와 그 너머의 것을 둘다 포함하지요.
완전히 다른 발달의 수준을 지닌, 더 큰 현실에서 온 한 욕구가 우리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 가슴 내면에 나타나는 것은 “가슴 속의 한 점”입니다. 카발리스트들이 그렇게 부르지요. 이 점은 더 큰 현실의 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고, 만약 이 욕구가 충족된다면, 이들 욕구와는 달리, 이는 계속해서 커져가서 우리의 전 경험, 우리 삶 전체를 채워나가서 우리를 영적 세계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위 현실이란 무엇일까요? 현실의 전체성을 습득한 카발리스트들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특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 말씀에 우리들은 그 상위 세계에 존재하는 자질에 정반대 상태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거기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림에서 보았듯 우리는, 인간 혹은 사람 혹은 피조물은 이기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상자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계속 그림]
상자 안에 존재하는 것을 “받으려는 욕구”라고 부릅니다. 이 받으려는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제한된 실존을 경험하게 만들고, 고통 고립등 삶에서 힘든 모든 것을 겪도록 만듭니다. 이것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로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베푸려는 욕구”라고 말합니다. 베푸려는 욕구는 무조건적인 이타심입니다. 다른 말로, 이 바깥에서는 무제한적인 실존, 끊임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도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느낄 수 없지요. 그런 방법이 있나요?
영적 세계에는 어떤 자질이 존재하고 그것은 물질 세계 속의 자질과 다릅니다. 물질 세계에서 우리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움직임이란 것은 전적으로 기계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형태와 그 사용 목적이 완전히 틀린 두가지 물체를 가져와 기계적으로 가까이 끌어당겨서 ‘이렇게 가까워졌네!”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어떤 것들이 가깝다고 여겨질 수 있기 위해서 완전히 다른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거기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거기에는 기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와 같은 내적 본질과 영성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두가지 느낌의 상태나 두가지 본질 사이의 동일성 혹은 이질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정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어요. 만약 내 친구가 코미디를 좋아하고 나는 코미디를 안 좋아한다면, 나는 그저 심각한 사람이라서, 우리들이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만약 내가 코미디를 싫어한다면, 우리들은 먼 사이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도 코미디를 좋아하고, 내 친구와 똑같은 코미디언과 그들이 출연한 영화를 좋아한다면, 코미디를 좋아한다는 것에 한해서, 그 느낌 내에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즉, 영적 세계에서는 두 속성이, 두 느낌이 비슷하면, 그것들은 사이가 가깝다고 간주되고, 속성과 느낌이 다르면 멀다고 간주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중한 것이며, 이것이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우리를 실제로 이동시켜 줄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만약 똑같은 본질, 목적, 그리고 의도를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들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들은 접착되고 접속되어 있지요. “형태의 등가성의 법칙”이라 불리는 법칙은 분리라는 이기적 상태에서 우리를 끌어내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부가적 감각을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림을 가리킴]
우리가 할 일은 이 베품이라는 본질을 안에 포함하는 어떤 동일파, 어떤 비슷한 본질, 부가적 감각을 우리 내면에 형성하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들이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카발리스트들은 현실에는 오직 두가지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오직 창조주와 피조물만이 존재할 뿐이라고요.
[계속 그림]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단순히 창조주의 본질과 피조물의 본질입니다. 창조주는 상위의 세계이고 피조물은 하위의 세계이지요. 창조주의 본질은 베푸려는 의지이고 피조물의 본질은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존재하는 전부입니다. 상자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은 영적 공간 속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공간 속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이 본질, 피조물의 본질인 받으려는 의지를 변화시켜 창조주의 본질에 조금씩 더 비슷해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세계들을 거쳐서 하강함으로 인하여 모든 현실은 우리들에게 감추어져 왔으며, 말하자면 베푸려는 의지에 반하는 받으려는 의지의 비율로 이들 세계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림 계속됨]
우리가 이 세상으로 하강한 이 사다리 전체를 되올라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순히 받으려는 우리의 내적 본질, 이기심, 나를 위해 받으려는 욕구를 변화시켜 받으려는 의지보다 베푸려는 의지의 비율이 점점 더 커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 단계들은 각각, 사다리의 디딤판인데요, 받으려는 의지에 비한 베푸려는 의지가 증가하는 비율입니다. 동일성이 높아짐으로써, 베품의 본질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것이 뜻하는 바를 느끼는 것이 가능해지고, 내 안에서 그 동일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카발라가 논하는 것입니다. 카발라는 베품을 감지하고 이 본질과의 내적 동일성을 창조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숨겨진 지혜에 대한 해독법을 살펴 보면서 우리가 검토해 나아갈 것입니다. 또 함께해 주십시오.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우리의 오감이 우리가 참현실, 영원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 우리 오감을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은 “이기심”이라 불린다.
- 우리를 둘러싼 더 큰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부가적인 감각을 발달시켜야 하며,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식스 센스”라고 부른다.
-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기쁨을 얻으려는 욕구(혹은 “받으려는 의지”) 에서 비롯된다.
- 우리 개인과 인류의 진화는 다섯가지 욕구를 거친다: (1) 음식, 성, 은신처; (2) 부; (3)명예, 자존심, 권력; (4) 지식; (5) 영성.
- 인간 본성은 받으려는 의지(이기심)이고 창조주의 본성은 베푸려는 의지, 무조건적 이타심이다.
- 형태의 등가성이라는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창조주와 동등해지기 위해서, 즉 이타적인 본질을 습득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저는 라브 미하엘 라이트만 박사의 제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박사는 랍비 예후다 아쉴락의 수 제자이자 그의 아들이었던 랍비 바루흐 샬롬 하레비 아쉴락의 수 제자입니다. 랍비 예후다 아쉴락은 바알 하술람, “사다리의 주인”으로 더 잘 알려있으며,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굴지의 카발리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카발라에는 가르침의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정격의 카발라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여러분들에게 학자가 아니라, 수행자의 관점을 제공합니다. 카발리스트라는 사람들의 관점이지요. 여기서, 여러분들은 정격의 카발라에 관한 개요는 물론이고, 이 지혜에 접근하는 방법과 기초 개념들이라는 열쇠를 얻어 그 지혜의 문이 여러분들께 열릴 것입니다. 카발라의 지혜는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 감각과는 아주 다른 학습 방식, 사고 방식, 그리고 느낌의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기술이 그렇듯, 이 지혜는 기초에 대한 마스터리가 필요합니다. 스무편의 수업 시리즈를 통해, 여러분들이 알아두어야 할 근본원리를 모두 다룰 것입니다.
카발라에 대한 개요에서 시작을 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혼란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가면 카발라에 관한 정보가 엄청 많지요. 제 생각에는 아마 매년 천 권 정도의 책이 출판되나, 그 가운데 카발라와 상관이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습니다; 그 책들은 사람들이 카발라라고 생각하는 것, 카발라가 틀림없다는 사람들의 상상, 그 사람들의 육감, 상상의 뒤범벅에 불과하며,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카발라가 진정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거대한 갈망이 존재하는 이유는 카발라가 중요하고, 강력하며, 이 세상에 감춰져있는 무엇인가를 카발라가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카발라가 “숨겨진 과학”이라고 불리는 데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카발라는 그 수행자들 스스로가, 즉 카발리스트들이 의도적으로 숨겨왔습니다. 카발라는 사천년 전에, 1947-1948 BCE(서력 기원 이전) 쯤에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기에서 –이천년- 두번째 신전의 붕괴가 있었던 서력 기원 초기까지 카발라는 숨겨지지 않았고, 널리 학습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텐트 앞문에 앉아서 여행자들을 환영하며 접대를 했다는 이야기를 아시지요. 사실 그가 실제로 한 일은 여행자들을 접대하며 카발라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준 것입니다. 그 당시 이 세상에 살았던 영혼들의 유형은 지금의 영혼들 보다 좀 더 정교했기에 그들은 카발라를 더 자연스럽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서력 기원 초기, 신전의 붕괴 시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로인해 그 세대는 물론 그 이후 이천년 동안 사람들은 카발라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 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들이 출현한 시점이지요; 인간 내면과 인간 발달에서 앞서 가려는 어떤 특정 원칙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우주란 무엇이며, 창조주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사고가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자라갔지요. 사람들 내면의 이런 자질이 이해를 가로막았기에 카발리스트들은 카발라를 숨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에 접근할 길이 없다고 해도 책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문제는 카발라 서적들은 읽는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매우 특별한 언어로 씌여져 있기 때문에 또한 숨겨진 지혜라고 불린다는 것이지요. 모든 카발라 서적들은 “가지(브랜취)의 언어”라고 불리는 언어로 저술되었고, 그 책들은 대상, 컵, 책, 탁자, 가족, 여행, 전쟁 처럼 우리 세상의 단어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모세의 다섯권의 책과 다른 모든 카발라 서적들에서 볼 수 있지만, 사실상 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어떤 카발라 책 속의 한 단어도 이 세상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들을 창조하고 지탱하는 상위의 힘에 대해 오직 언급할 뿐입니다.
카발리스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암시하는 특정 언어를 사용하였고, 어느 정도의 지혜를 습득한 학습자만이 그런 식으로 듣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원인의 세상이 아니라 결과의 세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도 상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상위 세계에 우리의 근원이 존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것들의 뿌리가 있는 곳이 거기입니다. 어떤 물리적 행위도 그에 영향을 못 미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어떤 것도 그 결과에 영향이 없는 이유입니다. 오직 뿌리에, 모든 것의 원인적 수준에 접속함으로써 어떤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을 카발라가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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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로서의 우리 현실은 말하자면 상위에 존재하는 세계와 하위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식으로 구조되어 있습니다. 가지(브랜취)의 언어는 하위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이라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토라” 속에서 여러분들은 그것을 읽을 것입니다. “토라”는 유대인들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말하자면, 한 가족이 “어떤 땅”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지만, 카발리스트들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런 것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유발시키는 상위의 추상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오직 현명한 학습자만이 여기서 실제로 다루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지 수준이고, 이것이 뿌리 수준입니다. “가지(브랜취)의 언어”라 불리는 이 언어에 대한 기호표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카발라의 숨겨짐에 대한 이 같은 두가지 관점의 결과에 덧붙여 가르침의 선과 참다운 방법론과의 접속 결여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알 필요가 있었지만 상상해야만 했지요. 그들은 여러가지를 혼합할 수 밖에 없었고 카발라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내적 자질과 올바른 가르침 없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만을 따랐던 것입니다.
수 많은 미신들이 생겨왔고, 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카발라의 기초 개념들을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저 몇가지 주요 미신들을 살펴보자면, 먼저 카발라가 유대교의 신비주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종교도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카발라가 종교보다 먼저지요. 종교는 상위의 힘과의 단절, 추측, 카발라에 대한 오해의 현상입니다. 비록 종교가 카발라와 동의성을 가지지만, 그것은 카발리스트들이 할라카(Halacha )를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서라고 간주하고 공부하는 책들을 창조했지요. 우리들의 전통 등이 그 책들에서 비롯되지만, 그 목적, 그 의미, 책이 실제로 저술된 이유와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카발라와 유대교와의 관계는 기억 상실과 같습니다.
신비주의에 관해 말하자면, 카발라는 과학이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법적이고 심오하기 그지없게 보이는 것들과 직접적 연결을 맺는 방식이 바로 카발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과학 기술도 본적이 없는 사막의 섬에 사는 부족에게 라이터를 가지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불의 신으로 대우받겠지요, 손바닥에서 불을 뿜어 낼 수 있는 어떤 신비한 존재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추어져 있는 것과 드러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카발라가 마법이라구요? 글쎄요, 마법이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이득 혹은 타인의 불리함을 위한 어떤 결과를 야기시킬 목적으로 사람들을 교묘히 조종하기 위해 숨겨진 상위의 힘을 이용함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내면의 도덕적인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는한 상위의 힘과 어떤 접속을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카발라에서 달성하는 것은 내적 변화의 문제이고 그것 없이는 어떤 힘에도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카발라가 마법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생생한 상상에 불과합니다 .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카발라를 공부할 수 있고 학습자가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조건 등이 존재한다는 오해도 있지요. 이것이 사실이 아닌 이유는 카발리스트들은 지금껏 태생이 유대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랍비 아키바 등등과 같이 위대한 카발리스트들 가운데 몇명은 사실상 다른 국가의 사람들인 비유대인이었지요. 모든 카발리스트들은 어떤 종류의 육체적 속성이 아닌 “예후드”라고 일컬어지는 내적 속성을 기본으로 학습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예후드”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또하나는 카발라를 공부하기에 앞서서 그마라, 미쉬나 등등의 예비적 지혜를 마스터했어야 한다는 오해지요. 토라 혹은 그마라에 씌여진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카발라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 같은 예비적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만약 이 같은 예비적 지혜에서 영성을 찾을 수 없다면 영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는 서적들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토라에 적힌 언어나 하가다 등등과 같은 이야기식 언어가 그러하듯 이 세상의 일을 다루는 것처럼 오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적과 보호, 그리고 문자와 숫자 조작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한다…글쎄요, 이것은 카발라가 다루는 것과 완벽히, 또 전적으로 반대가 됩니다. 사실상, 그것은 완전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기적이고 개인적 이유로 상위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맹목적 숭배로 간주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두려워 보호받아야 할 무엇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수, 부적, 붉은 실 등은 심리적인 것이지 카발라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발라와 동양의 종교와의 혼합이 있지요.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영성을 개방적으로 다루는 힌두교나 불교와 관련시켰습니다. 이는 오직 카발리스트들의 책에서는 영성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95년으로 카발라에 관한 모든 서적들이 개방되었습니다. 유일한 요구조건은, 학습자로 받아들여지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추구하면서 카발라를 대할 때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낀다고 할 때, 유일한 요구조건이라면 당신의 카발라에 대한 필요입니다.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와 삶의 의미 및 그 안에서 우리들의 역할 등에 대한 해답들이 다른 어느 곳에서도 구해질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필요조건입니다. 모든 위대한 카발리스트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리의 시대 이후로 이 욕구만이 유일한 필요조건이라고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카발리스트이자 예루살렘의 랍비 장이었던 라브 쿡은 누가 카발라를 공부할 수 있냐는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실과 틀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 카발라를 공부하면 미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선호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죠. 카발라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고, 현실을 이해하고 그에 연결되는 결과로 다양한 내적인 변화를 겪게 되고, 그 때 얻는 기쁨은, 그 기쁨의 근원은 일반적 사고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정반대인 이유는 영적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고의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목표에 반대되는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는 미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카발라가 “숨겨진 과학”이라고 불리는 세번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오감으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에 대해 다루기 때문입니다. 카발라는다른 곳에서 해답을 줄 수 없는 물음에 답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것에 답을 하지요. 이것은 심오하고 심각한 물음일 수 밖에 없지요. 이 물음을 가진 사람은 전통이 말하는 것에서도, 과학이 진술하는 것에서도, 예술과 문학이 묘사하는 것에서도, 심리학이 설명하는 것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으니까요. “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오감 너머의 것을 감지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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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 서적은 우리가 전체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의 전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거기서 우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완전히 제한된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제한성이 어찌나 큰지 우리 인생의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조차 모르지요. 왜 일들이 발생하고, 언제 발생하고, 우리가 어디서 왔고,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또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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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고 전체적인 현실이 존재하며 이 현실은 “세계들”이라 불리는 한 체계로 분리되고 축소되었습니다. 다섯 세계에 의하여, 완벽한 현실-끝없는 빛-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밝기로 줄여졌지요. 이 첫번째 세계는 “아담 카드몬의 세계”라고 불리고, 그 다음 세계는 “아찔룻”, 그 다음은 “베리아”, 그 다음은 “예찌라”, 그리고는 “아씨아”라 불립니다. 이 세계들을 의식의 수준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이 완전한 현실 및 그에 대한 자각과 연결로부터 하강함에 따른 가깝고 먼 거리감이지요. 그러다 우리는 마침내 “마흐솜” 혹은 “장벽”(마흐솜은 히브루어로 장벽이란 뜻입니다)이라 불리는 단절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영적 세계들입니다. 이 장벽 아래로는 우리 세상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고 우리의 근원지인 영적 세계에 대한 느낌이 우리에겐 전혀 없습니다 . 여기서 우리들은 “육체적” 혹은 “물질적”이라 불리는 한정된 느낌을 가집니다. 이 완벽한 빛과 전체 현실에 있어서는요. 우리가 이에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우리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우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안내하는 힘을 이해하게 되어서, 삶을 최대한으로, 모든 생명의 이로움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해지는 정도로 그 힘에 연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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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카발라 자체가 숨겨져 왔던 것처럼, 이 힘, 이 완벽한 현실도 고의로 감추어져 왔으며, 이 세상까지 125 단계라는 거리를 둔 체계를 통해 축소되어 있습니다. 카발라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으로 하강한 125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지요. 우리의 근원지인 영적 세계 속의 우리의 뿌리로, 전체 현실과의 연결됨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우리가 이것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주”라고 불리는 이 자비로운 힘이 우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 체계를 창조했던 것이죠. 즉, 이 창조의 지도는 창조의 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점입니다; 그 과정을 보면, 영적인 세계 속의 우리의 근원에서 현존의 상태까지 우리가 하강했고, 이는 창조의 계획을 실행하여 이 전체 현실과 재결합하기 위한 것입니다.
토라, 미쉬나, 그마라를 포함한 모든 카발라 책은 이들 단계들에서 발견된 상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이 완벽한 연결에서 떨어졌기에 생겨난 축소 과정 및 우리가 되올라 갈 길을 찾는 상황들을 말하죠. 카발라의 연구법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 세계를 감지하고 그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고, 무엇이 우리를 이 곳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으며, 어떻게 다시 영성을 얻을 수 있는지 배울 필요가 있지요. 이를 위해서 매우 특별한 교재, 우리를 영적 세계로 들여보내 줄 목적 하에 직접적으로 창조된 그런 교재가 필요합니다.
카발라 서적들은 브랜취의 언어로 저술되어 있어 우리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큽니다. 이 상위의 현실에 들어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이 서적들을 실제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카발라가 주는 커다란 선물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 세대, 즉 카발라의 지혜가 전 세계에 그것을 진정으로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1995년 이래, 특별한 책들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책들은 바알 하술람과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라바쉬에 의해 저술되었는데요, 이는 이미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카발리스트들을 위해 저술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씌여진 책들이지요. 이 책들은 우리가 영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기반을 마련해줄 특별한 언어로 저술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수업에 필요한 자료의 원본을 가져올 곳이 바로 이들 서적들입니다. 우리를 영적 세계 밖에 머물게 만드는 자질은 무엇이며, 우리를 영적 세계에 들어서게 하는 자질은 또 무엇인지 알아보고, 바알 하술람의 업적을 통해 카발라 과학에서 가르쳐주는 연구법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카발라의 지혜는 상위 세계와 우리 실존의 근원에 이르는 실질적 방법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우리 삶의 목적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은 완벽함, 평화로움, 무한한 즐거움을 얻으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하는 능력도 습득하게 된다. –라브 미하엘 라이트만 박사
다음주에도 우리와 함께 이 흥미로운 여정에 동참하세요.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What is in this lesson)
- 카발라가 “숨겨진 과학”이라고 불리는 3가지 이유
- 카발리스트들에 의한 고의적인 은폐
- 카발리스트들이 “가지(브랜취)의 언어”라는 특별한 언어로 텍스트를 저술하였음.
- 카발라는 우리 천성적 인식으로부터 감추어진 것을 연구함.
- 가장 대중적인 카발라에 관한 11가지 허위 진술과 이것이 진실한 카발라가 아닌 이유
- 유대교의 신비주의
- 종교
- 신비주의
- 마법
- 카발라를 공부하려면 유대인이어야 함
- 카발라 공부전에 예비적 지혜를 마스터했어야 함
- 성수
- 부적
- 붉은 실
- 보호를 위한 수단
- 동양의 가르침과 동일함
-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진실된 욕구만이 카발라 공부를 위한 유일한 필요조건임
- 카발라는 우리 삶과 우리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어떻게 우리 삶의 근원인 전체 현실에 연결되는 것이 가능한지를 연구함
- 주목하세요: “당신의 첫 카발라 코스”시리즈 전체를 공부하셨다면, 카발라 TV에서 이 비디오 수업을 계속하실 수 있습니다. 페이지의 오른 쪽에 있는 카테고리 가운데 “카발라가 밝혀내었다-풀”이라는 타이틀로 가셔서 “장막”이라는 6번에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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