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bbalah.info - Kabbalah Education and Research Institute

카발라 기초개요2

 

현실 인식하기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다시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첫번째 수업에서 우리는 카발라와 카발라가 아닌 것을 간략히 살펴보았지요. 카발라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보면, 그것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봅시다. 우선 카발라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여, 그 뜻하는 바를 살펴본 후 우리가 무엇을 이해할지 보겠습니다.

카발라는 인간, 사람으로 하여금 상위의 현실을 느끼고 이해하게 해주는 과학이자, 지혜입니다. 이것이 카발라가 말하는 삶의 목적인데요, 물론 여기에는 몇가지 의문이 따릅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상위의 현실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상위의 현실을 느끼고, 이해하며, 그 현실에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

여러분들이 기억하신다면, 이전에 이 그림을 살펴보았는데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그러니까 무제한적인, 완전하고 전체적인 현실 내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 삶이 전개되는 것이 보이지요.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히 상호 연결되어 있고, 끝없는 즐거움과 완전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으며,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접속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체 체계에 도달했던 사람들인 카발리스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런 존재 방식에서, 이런 방식을 거쳐서, “세계들”이라 불리는 시스템을 통하여 하강했다고 합니다. 세계들은 올라밈 이고, 히브루어의 올람의 복수로, 그 근언은 “숨다” “숨겨짐”이란 의미의 헤엘람에서 유래합니다. 우리들은 현실과의 이 완전한 결합에서 하강하여, 장벽이라 불리는 교차점인 이 곳을 지나서, “우리 세계”라고 불리는 한 장소, 여기에서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이 전개됩니다. 우리 세계는 이 모든 영적 세계들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이것이 물질 세계 혹은 유형으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만약 여러분이 삶의 목적, 당신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면, 그 계획에 대해 안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그건 마치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거의 개그의 소재가 되겠지만, 카발리스트들은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이 전체 현실에 도달한 사람들에 따르면 현실의 모든 것, 모든 창조된 것에는 계획, 즉 청사진이 존재합니다. 그들 말씀에 삶의 목적이란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우는 것,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현재 발생 가능하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의 전적인 의미이고,  목적이며, 방향입니다. 오직 그 목적 뿐입니다. 그 사고 속에,  그 의도 안에, 창조의 모든 것 배후에 존재하는 그 생각 내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일에 대한 모든 규율이 정해졌습니다.  영적, 물질적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기본 법칙들은 그 한 생각에서 발단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가져오려는 이유에서 발생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영적 세계 밖에 존재하게 만드나요?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글쎄요, 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 즉 우리가 현실을 인지하는 방법이 우리를 가두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

이것이 어떤 사람, 다섯개의 구멍을 가진 닫힌 상자입니다. 이 다섯 개구는 우리의 오감입니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상위의 현실, 완벽한 현실, 영적이며, 그 완벽한 현실에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것이 바로 외부의 현실로 보여지는 것이고, 그  형태가 잡히지 않은 어떤 종류의 것이 사람에게 다가오면, 우리가 가진 오감을 이용하여 그것이 무엇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나의 감각에 따라서 현실이 무엇으로 구성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죠.

이 영적인 대상이 상자에 접근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사실상 상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상자는 어떤 밀폐된 시스템인 것이, 이 대상이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장벽에 부딛칩니다. 그 장벽은 어떤 종류의 변환기인데요, 마치 고막 혹은 망막 혹은 피부나 미뢰의 표면에 있는 신경과 같지요. 외부의 이것을 들여오는 대신 이것이 환원되어 어떤 프로그램을 거쳐갑니다. 여기 이것요. 그것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감으로써  프로그램 내부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단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것은 우리 상자 혹은 이 기계를 떠나가고, 그것이 산출하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림 계속됨]

이 감지기가 얼마나 민감한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이것이 눈이라고 가정합시다. 그것이 허블 망원경이든 당신이 완전한 근시여서 당신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어도 상관없어요. 민감한 정도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작성이고, 이 주관적 시스템 내에서, 이 기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든지, 이 프로그램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될 뿐이죠. 이것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이 이해가능한 환원말입니다

이것을 제한하는 이 프로그램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객관적 현실이고, 이것이 우리가 인지하는 그 현실의 한정된 부분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기심”이라 불립니다. 그것은 자아 근심이지요. “그 안에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이지?” “이것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미칠까?”라는. 이 결과로 나는, 그 개인은 이 모든 주관적인 관점 속에 갇혀버립니다. 오직 그 상자 내부에서 느껴지는 방식과 관련된 관점이지요. 

우리가 가진 문제는 우리의 오감 모두는 그와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는 데 있어요. 오감 가운데 하나도 그 프로그램 외부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더 큰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서 우리는 부가적인 감각을 하나 발달시킬 필요가 있어요.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식스 센스”라고 부릅니다. 운세를 말해 주는 사람의 식스 센스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것에 실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감각으로, 그 같은 프로그램 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당신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이 있나?”라는 것에 만족하는 한 외부에서 작용하기, 즉 이 상자 밖에서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창조의 생각은 사람에게 이와 같은 완전한 충족감을 가져다 주는 법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상자 밖으로 나오려는 필요를 느끼도록 만드는 어떤 의욕적인  힘이 존재합니다. 우리들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이 안에 나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자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나 그건 괜찮습니다. 왜냐하면이 충족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는 법, 그것을 동력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창조의 생각이 우리에게 부여한 발달의 원동력을 이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현실에서 모든 것을 작동시킬까요? 모든 일들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것이 내적인 일이든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영적인 일이든지 말이죠. 발생하는 모든 일은 오직 무언가의 결과로 일어나는데요.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당신은 거기에 앉아있죠. 당신은 의자를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당신 눈도 그것을 쫓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당신은 음료수를 집어 들었을지도 몰르죠. 지금 당신이 연루되어 있는 어떤 움직이든지 그것은 오직 어떤 계산의 결과로 발생합니다. 그 계산이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불편함을 느껴서, 당신 내에서 어떤 필요가 발단하여, 나타났기에,  당신은 새로운 위치나 새로운 상황으로 움직였지요. 당신은 그 새로운 상황이 이전의 상황보다 더 큰 기쁨을 주리라고 믿고 있지요.

기쁨의 결여와 충족, 그리고 욕구라는 힘이 현실 속 모든 것에  동기를 부여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우리를 이 육체적 세상 밖으로 빼낼 것입니다. 물질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우리가 경험하는 한계들, 그리고 그에 동반되는 고통 너머로 말이죠. 제대로 이용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 장벽을 너머 이 길로 영적 세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기 시작함]

우리 모두는 욕구를 느끼고 그것이 변화함을 느끼지만, 날 때부터 우리 내면에 설정된 이 시스템에 사실상 신경을 안써서 그 시스템이 우리에게 어떻게 유용한지 이해를 못합니다. 기쁨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첫 생각은 그저 생존유형의 기쁨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간주하고 필요로하는 첫번째 카테고리에는 성, 음식, 은신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 우리의 직업, 우리 주위에서 습득하는 것, 우리 삶의 전체적 목표는 이들을 찾고 얻는데 있으며, 이 욕구는 인간과 동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이 욕구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관되지 않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이것이 필요할 뿐이죠.

 일단 이 욕구가 채워지면, 삶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그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두번째 카테고리의 욕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부에 대한 욕구입니다. 부는 첫번째 카테고리의 축척을 말하죠. 난 다시는 그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거죠. 일단 부에 대한 이 욕구를 채우고 나면, “이것이 전부일까?”라는 느낌이 들면서 다른 어떤 것이 우리 안에 자라나지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것은 단순히 또 다른 욕구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욕구죠. 그 이전의 욕구를 포함하는 그런 욕구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우리에겐 작은 욕구와 작은 만족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우리에겐 커진 욕구가 존재하고 그것은 더 큰 충만을 필요로합니다. 이것이 이것에 통합된 것이죠. 이제 부로서 충족이 안될 때는 새로운 욕구가 내 속에서 올라오며 그것은 권력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는 단순히 개개인들의 삶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역사상 전 인류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전체 역사는 이들 욕구들의 진화였던 것이지요. 권력은 이것과 이것 둘다를 지배하고, 가장 거대한 축척을 가져다줄 모든 시스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권력이고, 이것이 절대 지배권이고, 이것이 내 직업에서의 지배력입니다. 일단 그것을 가지면, 더 이상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나는 공허해집니다. 나는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네번째 욕구가 내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대한 훨씬 더 확장된 욕구, 지식에 대한 욕구입니다.

지식은 우리가 물질적 세계라고 정의하는 것의 일종의 장벽이죠. 이들 하나, 둘, 셋, 네가지 욕구들은 모두 우리가 기쁨이라 인식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으로 채워지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며, 우리를 만족시켜줄 것이지요. 이를테면 지식은 과학이고, 종교이며, 예술이죠. 인류가 성취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마지막에 지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위대한 욕구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그 욕구를 채우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욕구 또한 공허하다는 것을 결국 발견합니다. 과학에는 사태의 실질적 원인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을요. 과학에는 목적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계적인 해답 뿐이지요. 이들 욕구들과 관련된 해답들 뿐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믿음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직접적 지식에 접근시켜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이 욕구가 충족된 결과로 어떤 사람이 공허해지면 아주 다른, 매우 특별한 일이 생깁니다. 새로운 욕구가 눈을 뜹니다. 그러나 이 욕구는 이 세상의 욕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욕구입니다. 가슴이란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욕구들의 총합체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욕구와 그 너머의 것을 둘다 포함하지요.   

 완전히 다른 발달의 수준을 지닌, 더 큰 현실에서 온 한 욕구가 우리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 가슴 내면에 나타나는 것은 “가슴 속의 한 점”입니다. 카발리스트들이 그렇게 부르지요. 이 점은 더 큰 현실의 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고, 만약 이 욕구가 충족된다면, 이들 욕구와는 달리, 이는 계속해서 커져가서 우리의  전 경험, 우리 삶 전체를 채워나가서 우리를 영적 세계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위 현실이란 무엇일까요? 현실의 전체성을 습득한 카발리스트들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특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 말씀에 우리들은 그 상위 세계에 존재하는 자질에 정반대 상태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거기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림에서 보았듯 우리는, 인간 혹은 사람 혹은 피조물은 이기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상자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계속 그림]

상자 안에 존재하는 것을 “받으려는 욕구”라고 부릅니다. 이 받으려는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제한된 실존을 경험하게 만들고, 고통 고립등  삶에서 힘든 모든 것을 겪도록 만듭니다. 이것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로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베푸려는 욕구”라고 말합니다. 베푸려는 욕구는 무조건적인 이타심입니다. 다른 말로, 이 바깥에서는 무제한적인 실존, 끊임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도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느낄 수 없지요. 그런 방법이 있나요?

영적 세계에는 어떤 자질이 존재하고 그것은 물질 세계 속의 자질과 다릅니다. 물질 세계에서 우리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움직임이란 것은 전적으로 기계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형태와 그 사용 목적이 완전히 틀린 두가지 물체를 가져와 기계적으로 가까이 끌어당겨서 ‘이렇게 가까워졌네!”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어떤 것들이 가깝다고 여겨질 수 있기 위해서 완전히 다른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거기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거기에는 기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와 같은 내적 본질과 영성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두가지 느낌의 상태나 두가지 본질 사이의 동일성 혹은 이질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정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어요. 만약 내 친구가 코미디를 좋아하고 나는 코미디를 안 좋아한다면, 나는 그저 심각한 사람이라서, 우리들이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만약 내가 코미디를 싫어한다면, 우리들은 먼 사이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도 코미디를 좋아하고, 내 친구와 똑같은 코미디언과 그들이 출연한 영화를 좋아한다면, 코미디를 좋아한다는 것에 한해서, 그 느낌 내에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즉, 영적 세계에서는 두 속성이, 두 느낌이 비슷하면, 그것들은 사이가 가깝다고 간주되고, 속성과 느낌이 다르면 멀다고 간주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중한 것이며, 이것이  물질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우리를 실제로 이동시켜 줄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만약 똑같은 본질, 목적, 그리고 의도를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들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들은 접착되고  접속되어 있지요. “형태의 등가성의 법칙”이라 불리는 법칙은  분리라는  이기적 상태에서 우리를 끌어내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부가적 감각을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림을 가리킴]

우리가 할 일은 이 베품이라는 본질을 안에 포함하는 어떤 동일파, 어떤 비슷한 본질, 부가적 감각을 우리 내면에 형성하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들이 그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카발리스트들은 현실에는 오직 두가지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오직 창조주와 피조물만이 존재할 뿐이라고요.

 [계속 그림]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단순히 창조주의 본질과 피조물의 본질입니다. 창조주는 상위의 세계이고 피조물은 하위의 세계이지요. 창조주의 본질은 베푸려는 의지이고 피조물의 본질은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존재하는 전부입니다. 상자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은 영적 공간 속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공간 속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이 본질, 피조물의 본질인 받으려는 의지를 변화시켜 창조주의 본질에 조금씩 더 비슷해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세계들을 거쳐서 하강함으로 인하여 모든 현실은 우리들에게 감추어져 왔으며, 말하자면 베푸려는 의지에 반하는 받으려는 의지의 비율로 이들 세계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림 계속됨]

우리가 이 세상으로 하강한 이 사다리 전체를 되올라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순히  받으려는 우리의 내적 본질, 이기심, 나를 위해 받으려는 욕구를 변화시켜 받으려는 의지보다 베푸려는 의지의 비율이 점점 더 커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 단계들은 각각, 사다리의 디딤판인데요, 받으려는 의지에 비한 베푸려는 의지가 증가하는 비율입니다. 동일성이 높아짐으로써, 베품의 본질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것이 뜻하는 바를 느끼는 것이 가능해지고, 내 안에서 그 동일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카발라가 논하는 것입니다. 카발라는 베품을 감지하고 이 본질과의 내적 동일성을 창조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숨겨진 지혜에 대한 해독법을 살펴 보면서 우리가 검토해 나아갈 것입니다. 또   함께해 주십시오.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우리의 오감이 우리가 참현실, 영원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 우리 오감을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은 “이기심”이라 불린다.
  • 우리를 둘러싼 더 큰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부가적인 감각을 발달시켜야 하며,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식스 센스”라고 부른다.
  •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기쁨을 얻으려는 욕구(혹은 “받으려는 의지”) 에서 비롯된다. 
  • 우리 개인과 인류의 진화는 다섯가지 욕구를 거친다:   (1) 음식, 성, 은신처; (2) 부; (3)명예, 자존심, 권력; (4) 지식; (5) 영성.
  • 인간 본성은 받으려는 의지(이기심)이고 창조주의 본성은 베푸려는 의지, 무조건적 이타심이다.
  • 형태의 등가성이라는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창조주와 동등해지기 위해서, 즉 이타적인 본질을 습득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공유하기


고대의 지혜 카발라: 더 평화로운 삶을 위한 길잡이

korean-book-157x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