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길&토라와 미쯔봇의 길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잘 오셨습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발달의 동력, 욕구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발달의 길에 따라 현실이 우리를 움직이는 법을 알아 보았습니다. 상위 세계, 영적 세계를 정의하는 본질과 물질 세계를 정의내리는 본질을 검토했고, 영적 세계는 우리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더 큰 현실이라고 우리가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지요.
우리는 욕구의 진화에 대해서도 논했습니다. 살펴본 바로는 육체적이라 간주되는 욕구는 네가지로 나누어지고,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무한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창조주가 즐겁다고 정하는 것에 의해 진화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생각에서 시작된 진화의 전 과정은 결여와 충족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욕구는 단순한 욕구(성, 은신처, 음식, 가정에 대한 동물적 욕구) 에서 발달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채워질 때, 우리는 더 큰 욕구로 옮아가지요. 그것은 부에 대한 욕구이고, 이는 첫번째 욕구의 축척입니다. 그 욕구가 우리에게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전히 무언가가 우리를 몰아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죠. 그것은 우리를 앞으로 밀고 당깁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떤 맛, 우리가 소유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향해 전진하지만, 일단 그것을 가지고 나면 더이상 그 맛을 볼 수 없죠.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진화의 힘입니다. 그 다음에는 부에서 명성과 권력으로 옮아갑니다. 일단 그것을 충족시키고 나면 우리의 공허함은 지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지식이 공허하다고 느끼면 이 세상 무엇도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되새겨보면 그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발전이 가능해졌지요.
고통의 길& 토라와 미쯔봇의 길
[토니 코즈넥]
그 독특한 욕구가 영적인 것에서, 즉 베푸려는 의지라는 본질에서, 가슴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인간 가슴 내면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 버립니다. 카발라에서 “가슴”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는 어떤 사람이 가진 모든 욕구의 총합을 뜻하는 데요, 인간의 가슴은 물질 세계에서 오는 욕구들로 아직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들은 카테고리 일, 이, 삼, 사에서 온 것들이죠.
영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욕구인 이 욕구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며, 이는 두 단어의 히브루어에서 옵니다. 이는 “곧바른”을 뜻하는 야사르와 “신”을 뜻하는 엘이 합해진 것으로 신과의 직접적 연결을 원하는 욕구입니다. 반면 육체적인 욕구들은 “국가들”, “세계의 국가들” 이라고 불리며, 이는 물질 세계의 욕구들을 가리킵니다.
여기까지는, 즉 물질 세계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실제로 느낄 필요가 있는 시점에 오기까지는, 발달의 동력, 그러니까 욕구가 우리를 움직인 방법은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지요. 그러나 지금부터 그것이 의식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슴 속의 이 점은 영적인 유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의 태아와 같지요. 영혼은 욕구의 한 종류이고 그것은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가슴은 이 욕구로 가득 차야 합니다. 육체적 욕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모든 구석을 메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욕구들은 변화, 교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죠. 오직 이들 욕구들을 교정함으로써 신에게 직접적으로 가려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본래 상태에서, 우리 영혼의 기원에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로 창조주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것이 창조에 존재하는 유일한 두가지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죠.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존재로, 하나의 단일된 피조물로 창조주에게 붙어 있었어요. 그러나 피조물을 창조하여 기쁨으로 채운다는 창조의 생각 때문에 그것은 오직 출발점이었고, 그것이 시스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받으려는 욕구인 이 피조물의 본질은 의도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고, 이 본질, 나 스스로만을 위해 받으려는 욕구가 확대된 결과 창조주의 본질(베품)과 피조물의 본질(받음) 사이에 더욱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기적인 의도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최초의 피조물이자, 전체 피조물이며, “아담 하 리숀”(최초의 인간이란 뜻)이라 불리는 집단 영혼은 세계들이라는 시스템을 거쳐서 하강했지요. 125 단계를 거쳐서 점점 더 큰 이기심에 가까워져 마침내 그 영혼이 소위 육체 중심주의로 분리되는 어느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즉, 그 집단 영혼은 육십만개의 부분으로 흩어졌고, 각 부분은 본래 영혼의 한 조각을, 즉 이들 각 부분들은 한 욕구를 소유하게 되었지요. 과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이건 아직 중간점일 뿐이지만) 이 부서져 흩어진 집단 영혼 속에서 우리는 고립과 분리, 서로를 향한 적대감, 서로를 착취하려는 욕구 및 물질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합니다. 이는 중간점일 뿐이고 집단 영혼은 교정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계들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창조주와의 하나되는 이 상태로 되올라갈 것입니다. 물론 한번에 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고의로 집단 영혼이 육십만개의 부분으로 부서진 것입니다
각 부분들은 613가지 욕구로 또다시 부서졌습니다. 즉, 아담 하 리숀 내의 각 개별 욕구는 교정이 가능한 613가지 욕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들은 충분히 작습니다. 마치 거대한 보물을 나누어 각 개인에게 동전 한푼을 주는 것과 같아요. 각 개인들이 이 베품의 자질을 되돌려 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 가슴 속의 한 점이 그 근원으로 그 한 점을 되돌려 와서, 한 집단으로서 다시 한번 그 보물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신뢰를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욕구를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의 한 점 내에서, 창조주의 보물함에서 온 이 동전과 가슴 속에 존재하는 612가지 다른 욕구들은 조금씩 변화되어 창조주의 본질에 더욱 더 닮아가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뒤집기 위해서 말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정(틱쿤), 변화, 창조의 생각의 충족이라는 되돌아감의 이 과정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들 모두, 그러니까 육십만개의 집단 영혼의 모든 조각들은 재결합하고 육체적 이기적 인식과 고통의 세계에서 상승하여 완벽하고 전체적인 상호 관계 속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주와 하나됨이라는 우리는 창조의 목표에 이르고, 이 가장 크고 무한한 욕구에 대한 완전한 충족을 이룰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은, “그것이 우리 동의 하에 의식적으로 전개될 것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인가?” 입니다.
우리에게 목표는 하나이고 그 목표는 확정되어 있으나, 목표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고통의 길”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토라와 미쯔봇의 길”이라 불립니다.
고통의 길은 우리들 모두가 이미 가고 있는 길이지요. 그건 실제로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느리고 애타는 인류의 진화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 특징에, 우리의 육체적 인식 방법에 연연하는 일종의 매달림입니다. 그 발달 과정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한 결과 우리는 사건들에 의해 강요당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대참사, 쓰나미를 목격하고, 전쟁들을 봅니다. 생에서 개인적인 경험도 합니다. 욕구의 발달 과정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참여하여 욕구를 교정하지 않기 때문에 야기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습니다. 이 길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으며, 그것은 비참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일단 가슴 속의 한 점이 나타나면, 그것은 의식적인 참여가 되고 이것이 토라와 미쯔봇의 길입니다. .
토라는 “빛에 의한 소개”를 뜻하고, 미쯔봇은 613개의 욕구 중의 한 욕구의 본질이 이기적인 것에서 이타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매 사건은 사실상 미쯔바(미쯔봇의 단수), 즉 우리에게 주어진 변화의 기회입니다. 제가 미쯔바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일을 하라고 지시받는 그런 육체적 계율을 뜻하지 않아요. 유대인 식탁 법률인 슐한 아루흐 등에서 이같은 것들에 대한 리스트가 있습니다. ‘이 육체적 사항을 지금 행하라’는 식으로요. 그런 육체적 사항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적 교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욕구에 대한 교정이지요. 그러므로 당신이 그 외적으로 선행을 하더라도-종교적인 선행이든 혹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든 상관없이- 어떤 외적인 행위를 할 수는 있지만 당신은 미움과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행위로는 아무것도 잴 수 없어요. 우리는 613가지 욕구 중 하나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사건으로서 말이죠.
이 발달 과정에 의해 우리의 전 생애는 그런 식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를 위해 받으려는 욕구로서 우리가 우선 느끼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창조주의 생각을 이해하려 시도하며 그것을 이타적인 형태로 변환시킬 기회를 제공하지요. 내게 그 상황을 주는 배후의 생각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듯, 영적 차원에서 우리가 진화하는 유일한 길은 내면의 본질을 변화시켜 내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영성 속의 본질에 닮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욕구에 따라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것은 나는 창조주를 알고 싶다는 것이죠. 즉 직접적인 느낌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 욕구들 속에서, 내 삶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일들 속에서 그 분의 생각, 상위의 그 분, 내게 이 완벽하고 체계화된 상황을 부여한 상위의 단계의 생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 상위의 단계는 내게 이 기회를 부여했지요. 마치 생일 선물처럼, 우선 그 부패한 형태 자체로 내게 가지게 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보고 분석함으로써 그 배후의 그 분의 생각을 느끼는 것, 그것이 미쯔바이고, 그것이 틱쿤이며, 그것이 변화입니다.
우리는 125 단계에 걸쳐서 완벽한 현실과 상호 연결에서 개인과 개인적 욕구라는 현재의 분리된 상태로 하강하였는데요, 이들 125 단계들 또한 이 613 가지 미쯔봇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변화라는 교정이 수행자를 사다리 꼭대기까지 데려올라 갈 것입니다.
각각의 하강의 단계는 우리들 내에 유전자로서 남아있는 것이 특색입니다. 받으려는 의지의 강도가 점점 더 보태질 때마다 길에 뿌려진 빵가루처럼 그 기억이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이 가슴 속 한 점은 최초의 영적 유전자로서 우리에게 상승의 가능성을 주며, 이는 “레쉬못”이라 불리는 영적 유전적 특징이란 사슬의 시작점이지요. 레쉬못은 기억들이고,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며, 이것이 받으려는 의지의 613가지 변화와 베푸려는 의지(우리를 창조주에 이어주는 것) 사이에 다리를 놓아줍니다. 매 사건이 우리를 위해 완벽한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챌 기회를 가집니다.
교정과 변화라는 이 행위, 틱쿤은 우리들에 의한 것이 아님에 주목합시다. 영적인 빛과 우리가 접속을 해야 하는 욕구의 결과로 틱쿤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의 결과로서 빛이 그 작업을 해주는 것이지요. 그것은 둘러싸는 빛에 의해 우리에게 되어진 행위입니다
조하르에서는 “어떤 이가 자신을 정화하러 올 때, 그는 천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즉, 네가지 육체적 욕구들이 변화되어 베품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더 큰 욕구가 생기게 된 것은 거기에 사용된 중요한 욕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혼자서 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 작업은 “신의 일”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우리가 훌륭한 군인들처럼 밖으로 나아가 신이 내려준 일을 마무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확대된 욕구의 결과로서 변화, 정화, 틱쿤이라는 작업 자체가 빛에 의해 우리에게 행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빛”이라는 단어에 혼돈하지 마세요. 그것을 물리적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적 세계에서 본질은 속성의 본질임을 기억하십시요. 그것은 의도, 감각적 상태의 본질입니다.
만약 당신의 의도와 빛의 의도 사이의 차이를 느끼고 싶다면, 우리가 물질 세상에서 그렇게 하듯이 단순히 우리에게 어떤 욕구가 있어서 그것을 곧바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상태와 빛의 상태 간의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즉 나의 의도와 빛의 의도 사이의 차이죠, 빛을 감지할 수 있는 어떤 것, 감각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감각 장치는 어떤 의도여야 합니다. 그것은 “장막”이라 불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가적 감각, 식스 센스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이 장막은 공진기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보내주는 욕구 사이의 대비점입니다. 빛에 의해 주어진 것이죠. 그것이 곧바로 안에 들어가는 대신, 이 장막에 부딛혀 어떤 느낌을 야기시키죠. 이 의도와 여기 이 의도 사이의 차이에 대한 느낌말입니다. 이 장막, 혹은 마사흐(히브루)가 도구입니다. 우리 작업에 사용할 유일한 도구이자 우리의 구성요소인 받으려는 의지를 매우 다른 어떤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길이 이것입니다. 오직 영적 세계의 의도에 맞는 의도에 따라서만 빛을 받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해 나중에 더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즉, 여기 이 안의 느낌이, 장막 안의 의도가 빛 속의 의도와 동일하다면요. 이것은 “교정된 욕구”라고 불립니다. 이 차이가 우리 내면에 어떤 필요, 올바른 필요, 특정 필요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특정 방향으로 부족함을 창조하지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없는 것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를 만듭니다. 즉 빛, 빛 배후의 생각과 의도에 대한 느낌을 갈망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큰 교정을 이루어가는 의도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욕구가 그 부패한 형태에서 그것의 완벽화된 형태로, 즉 받으려는 의지에서 베푸려는 의지로 변화를 할 때마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에 접속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를 점점 더 전체 과정 배후의 생각에 연결시킵니다. 이 한 특정 욕구에만, 오직 한 개인에게만 그것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담 하 리숀 속의 상호 연결의 결과로서 사람1의 부분, 즉 사람1 내의 욕구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다른 모든 욕구들 속에서 교정이 되고 그 욕구들을 재결합시킵니다.
그래서 그것이 교정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승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실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 그 배후의 생각,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건 말건 간에 이것이 변화합니다. 전체 시스템 배후에 존재하는 완전한 선을 느끼는 것이 가능해져서 선과 악에 대한 물질적 사고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됩니다.
그 과정 배후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깨달음입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좋고 나쁜 사건들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우리가 일어나기를 원하는 일들과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일들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옳은 일을 하거나 그릇된 일을 한다는 느낌, 어떤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느낌, 현실에는 선한 힘과 악한 힘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받으려는 의지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든지 그것 배후에 있는 진실한 한결같은 생각 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다음 시간에 함께하셔서 발달의 동력 및 고통의 원인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검토해 봅시다.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우리의 본래 상태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와 형태의 동등함에 존재하며, 무한한 충족과 영원함 및 완벽함을 경험한다.
- 우리는 우리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 가도록 예정되어 있으며, 거기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1)고통의 길 (2) 빛과 변화의 길
- 고통의 길은 우리의 무의식적 발달이다. 인류의 전 역사는 이 고통의 길을 거쳤고, 우리가 어떻게 발달되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고통의 길에서 우리는 인식의 결여로, 우리를 안내하는 그 힘과 같아지지 못하기에 고통을 경험한다.
- 빛의 길을 따를 때, 우리의 본성과 우리를 안내하는 그 힘의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고통을 넘어서 기쁨의 원천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이 힘으로부터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