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의 동력과 고통의 의미
안녕하세요, ‘카발라가 밝혀내었다’에 다시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토니 코즈넥입니다.
이전 수업에서 우리는 현실의 청사진, 창조의 생각, 창조주의 행동, 상위 세계의 본질 및 영성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이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이 피조물을 무한한 기쁨으로 채운다는 것이며, 이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유일한 이유이고,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은 이것의 결과입니다. 모든 일은 이 창조의 생각에서 오고, 그 창조의 생각을 실행하는 도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본질을 이해하고 말고에 상관없이요. 이것이 우리가 가진 문제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리고 삶에 대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질문이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느끼기란 불가능하며, 그래서 이런 자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창조주가 완벽하게 선하고, 선만을 행한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악이 보일까? 왜 나쁜 일들이 존재할까?”
이 물음을 검토하기 위해서 카발리스트들은 우리에게 경계선을 그어 놓았는데요, 우리가 혼돈없이 진실한 해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연구 방법에 대한 경계선입니다.
바알 하술람 말씀에 카발라에 다음과 같은 법칙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습득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이 붙을 수 없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창조주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이지, 어떤 아이디어나 어떤 종류의 지능화가 아닙니다. 지능화 속에는 진정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 자신있게 느낄 수 없지요. 당신 앞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듯이, 혹은 당신 두 다리가 서 있는 곳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내면에서 느끼는 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것은 느껴져야만 합니다. 아이디어나 추상적 개념 속이 아니라 오직 인식 내에서만 참다운 변화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데요, 우리가 현실의 절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절반, 그가 나쁘다고 간주하는 일들을 인간은 부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내적 프로그램 때문인데요, 이는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그 받으려는 의지는 시스템의 안내서 역할을 하지요. 즉, 그것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우리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선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우리를 끌어 당기거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 것, 우리에게 공허함을 주는 것으로부터 도망쳐서 멀리 달아나게 합니다.
우리들은 지속적으로 좋게 여겨지는 것들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두 종류의 사건들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그릇된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전체 그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언제나 그림의 작은 한 부분에만 촛점이 맞춰지지요. 우리는 문제 자체의 수준 내에서 그림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식이 대조의 결과로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뜨거움이라는 정반대의 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차가움을 알지요. 내리막에 연관시킬 때만 오르막을 이해하구요. 만약 뜨거움 그 자체의 본질만을 바라본다면, 그에 반대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정반대의 본질이 없었다면, 그것은 어떤 요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겠지요. 만약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떤 것을 측정할 길이 없었다면, 뜨거움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테죠. 단순히 감각이 없었을 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으로 간주하는 것, 또 우리가 그것을 선으로 간주하는 이유와 우리가 나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또 그 이유를 비교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잣대의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거죠. 더 큰 현실의 영역과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받으려는 의지에서 오는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잣대는 전부 다 완전히 주관적입니다. 그건 전적으로 슬라이딩 스케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건들이 우리에게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깊이 검토해 보면, 당신의 진실한 반응을 검토하려 한다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습득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이 붙을 수 없다.”인데요, 당신은 그 실제 경험을 검토해야 합니다.
쓰나미 대참사를 예로 들어 보세요. 40만 명이 그 참사로 숨을 거두었고, 이것이 비참하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테죠. 생명을 잃은 것은 끔찍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끔찍하고요. 이것은 거의 상상조차 불가능한 정도의 대형 참사, 악이죠.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지역을 재개발할 기회를 얻은 기업의 소유주 가운데 한명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에게 지난 5년간 발생한 일 중 최고일테죠. 그럴 때, 실제로 당신은 무엇을 경험했습니까? 당신 아이디어에 따라서 “이것에 관해서는 이런 식으로 느껴야만 해.”라고 하면서, 선한 것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것이고, 악한 것에 대한 아이디어는 저것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당신이 실제로 느끼는 바대로 따라야합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어떤 잣대로 잰다면 당신은 가상의 무엇을 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위의 생명의 수준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나쁜 일로 생각지 않다가 나중에는 좋은 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사실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산불과 같은 경우를 보면, 우리는 엄청난 피해가 입혀진 것을 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나무들에게 해가 되었지만, 크게 보면 이 일이 일어난 목적이 있지요. 앞으로는 더 무성한 숲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풍성한 숲, 더 건강한 숲이 생길 것입니다. 숲이 잘 성장하게 방해했던 것들이 이제는 변화했습니다. 재난을 좋은 일로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한 과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위에 존재하는 생존 단계를 보며 더 큰 발달의 곡선을 이해하게 되지요.
우리 하위에는 무생물 수준, 식물 수준, 동물 수준이 존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수준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 인간 수준은 그저 복잡한 동물 단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프로그램과 무의식적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더 큰 범위에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요, 그저 어떤 한 단면을 보는 것이 아니구요. 그걸로는 일의 계획이나 진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알 수 없어요. 인간 수준에서 이 단면만 본다면 이해 불가능하죠. 어떤 상위의 수준으로 우리 자신의 머리를 끌어 올릴 수는 없어요. 더 상위의 단계에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며,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말하는 단계”라 부릅니다
인간의 “말하는 단계”야 말로 우리가 상위의 체계의 한 부분이 되기 시작하여 창조주가 이끌어 가는 전체 체계를 이해하게 되는 단계지요. 우리를 좋은 것 쪽으로 끌어당기고 나쁜 것으로부터 밀어내는 받으려는 의지를 통하여 우리를 움직이는 유일한 힘이 창조주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단계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삶 속의 사건들을 분리된 덩어리들로 보고,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을 실제로 알지도 못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것들을 끼워맞추려 하는 노력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이 상위의 상태 속에 우리들 스스로를 들여놓는 일이 가능해질까요? 어떻게 이 상위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까요? 사실은 우리들이 그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상위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의 도움으로 그것이 가능해지며, 그럴 때 우리는 그것에 닮을 수 있습니다.
진화의 힘은 욕구의 발달과 같다는 것과 이 상위의 빛이라는 체계는 우리가 이들 욕구들을 따라 움직여서 올바른 것을 원하게 될 때까지 오도록 조정해왔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발달에 우리들이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참여해왔지요. 어떤 사람 내면에 자각이 일어나는 때가 될 때까지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여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지대로 이를 계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각성은 우리가 선하고 악하다고 부르는 사건들에 의해 조정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욕구들은 계속해서 진화되고 변화하여 우리의 물음이 더 커집니다. 우리가 역경이라고 여기는 이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수준에서 그 물음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고통을 야기시키는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왜 고통받고 있으며 어떻게 고통을 멈출 수 있을까?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 이 발달의 동력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움직여갑니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오직 상위의 단계에서만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위의 단계가 시스템을 이끌어가고, 좋고 나쁜 사건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도록 만듭니다.
사람의 감각 안에 이 의식적이고 실체적인 욕구가 발생하였기에 다른 어떤 욕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 이 의식적이고 실체적인 욕구 뿐이지요. 이제 그 해답은 갈 곳이 생겼지요. 사람이 그것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어요. 그러나 우리 고통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슬라이딩 스케일에 빗대지 않고 그것을 느끼거나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요. 그것은 받으려는 의지에서 올 수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은 창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기만 하지요. 그건 무조건적인 베품이고, 피조물의 본질은 받는 것, 자기 혼자만을 위해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이 두가지 간의 차이를 측정함으로써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느끼기 시작합니다. 느끼고 감지하도록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내가 그것을 감지하는지가 관건입니다. 나는 그것을 무엇처럼 느낄까요?
우리들은 빛의 바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들은 항상 우리 그릇(클리) 안에, 기쁨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받으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상위의 빛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채워주고 있어요. 즉, 빛 그 자체에 대한 느낌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창조주인 것이죠.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거기에 어떤 옷을 입히는지, 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우리에게 달렸지만 말이죠.
우리 삶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곧바른 빛으로 느끼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식으로 느끼면, 우리는 그것들을 받으려는 의지를 통해서 느낀다는 뜻이고, 그것들이 주어진 이유를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그것 속의 생각을 느끼는 일입니다. 이처럼요. 여기 이 본질은 무엇인가? 이 사건을 우리에게 주는 배후에 있는 창조주의 의도, 즉 베품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를 충족으로 이끄는 발달의 동력과 이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때 우리는 그 사건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창조주가 옳다고 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바른 사람, 짜딕(히브루어)입니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 사건을 제공하는 배후의 생각, 창조주가 이끄는 자비로운 힘을 느끼는 사람이 짜딕입니다. 우리 클리 속에 우리가 느끼는 바와 창조주의 생각의 차이 즉, 창조주의 생각에 비교한 우리의 생각, 이것이 바로 고통의 근원입니다.
나의 본성, 즉 빛을 받으려는 나의 의도와 빛을 주려는 창조주의 의도 사이의 차이가, 이 불일치함이 나에게 불편함, 고통 등을 야기시킵니다. 이 베품의 본질, 즉 상위의 빛을 주려는 본질은 우주 일반의 법칙이고, 우주의 모든 것은 그것을 따릅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이를 따르죠. 모든 생명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내면에 존재하는 것 사이의 균형, 항상성을 찾을 의무가 있어요. 그러므로 삶에서 이 법칙을 지키지 않는 만치, 즉 그 법칙과 닮지 않는 만큼, 우리 세상은 물론 모든 국면에서 고통스러워 집니다. 단지 인간 뿐만이 아니라, 주위 모든 것들-세상, 국가, 가족, 모든 현실이 고통을 받지요.
상위의 빛을 끌어 당겨 창조주를 이해하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서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카발라 텍스트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카발라 텍스트를 공부하는 유일한 이유는 교정하는 빛을 끌어당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지적인 앎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한 것이죠.
우리가 텍스트를 읽어나갈 때 여러분의 물음을 끄집어 내세요. 여러분이 가장 알고 싶은 것, 그것을 기억하였다가 읽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겁니다. 지적으로 무엇을 이해하든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여러분이 원하고 느끼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 글은 “그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이며, 이는 바알 하술람께서 말씀하신 것을 아들인 라바쉬가 녹음한 것입니다.
씌여 있기를, “그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뜻은 이 세상에는 그에 반해 어떤 것을 할 능력이 있는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보기에, 즉, 상위의 왕실을 부인하는 만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좋고 나쁜 사건들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어떤 체계를 보게끔 고의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선에 반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느낍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게 막는 어떤 것이 있다고 느끼지요. 그 이유는 상위의 힘 자체가 이렇게 되도록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목적이 있지요. 상위의 힘의 뜻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만들 수 있는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교정으로 간주된다, 일컬어 “왼쪽은 밀어내고 오른쪽은 가까이 한다,” 그 뜻은 왼쪽이 밀어내는 것이 교정으로 간주된다. 즉, 시초부터 사람을 옳은 길에서 전환시킬 목적으로 온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이것들이 그 사람을 성스러움에서 밀어낸다.
이 말씀은 창조주를 직접적으로 느끼기 불가능한 이 경험, 이 힘이 우리를 멀리 밀어내는 것 같은 이 느낌, 이것이 “교정”이라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이는 이 체계의 부분이죠. 그것을 일컬어, ‘왼쪽은 밀어 내고, 오른쪽은 가까이 한다’라 합니다. 즉 창조주에 가깝게 끌어당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를 느끼기를 원하는 사람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삶의 일반적 사건들이 아니라요. 비록 그것들이 같은 구조로 되어있지만요. 모든 자연의 단계들은 똑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는 시초부터 사람을 옳은 길에서 전환시킬 목적으로 온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이것들이 그 사람을 성스러움에서 밀어낸다.” 그 말은 어떤 사람이 창조주에 대한 느낌, 삶을 지배하는 법칙, 성스러움을 맛보려 한다면, 그것은 케두샤이며, 이는 분리됨, 떨어져 있음을 뜻합니다. 그 케두샤의 본질은 베푸려는 의지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요. 완전히 이 세상 위에 존재하죠. 그러니까 이 체계 속에는 의도적으로 사람이 성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멀어짐의 혜택은 그것들을 통해서 사람은 신의 도움에 대한 완전한 욕구와 필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욕구가 존재하면, 즉 창조주를 알려는 의도가 존재하면, 이 밀어 냄은 우리가 전체 자연 체계에서 보아온 것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필요를 야기시키는 것이죠. 이는 어떤 특정 필요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자동차, 부, 음식, 성, 지식, 권력 등의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필요가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필요를 의미합니다.
…이 멀어짐의 혜택은 그것들을 통해서 사람은 신의 도움에 대한 완전한 욕구와 필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욕구는 직접적으로 신을 향한 욕구, 직접적으로 신에 대한 욕구(히브루어로는 야사르 케엘), 직접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을 향한 욕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길을 잃어버림을 알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지도하는 상위의 힘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의 수행에서 발전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는 것을 알게된다.
말하자면, 이것을 원하면 원할 수록, 빛은 사람의 내적 상황과 빛의 상태 간의 차이를 더욱 더 드러냅니다. 이것이 “악의 적발”이라 불립니다. 왜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할까요?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잣대가 되기 때문이죠. 대조에 의해서만 우리는 어떤 것을 알게되니까요.
우리는 사랑의 거대함과 창조의 생각의 완벽함을 우리의 장벽에 빗대어 측정합니다. 그 장벽 내에서 우리 자신들의 본성을 감지하기 시작하지요. 그러므로 이 대조의 과정을 통해서 창조주와 상위 세계의 본성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본성 또한 드러납니다. 받으려는 욕구가 자라면 자랄 수록, 특히 창조주와의 연결을 받으려는 욕구가 자랄 수록, 더욱 더 큰 창조주의 느낌이 그 욕구를 채울 수 있어요.
그의 수행에서 발전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 말해, 그와 창조주 간의 차이를 알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에게는 겉으로만이라도 토라와 미쯔봇을 지킬 힘이 부족하다. 즉, 창조주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창조주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이유에서 그것을 행한다고 자신을 속이는 일조차 불가능해집니다. 사람들은 차이의 정도가 가장 심하다고 느끼죠, 그러나 이것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받으려는 의지의 확대와 그것의 교정에 의해서 실제로 우리가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장애물들을 참으로 극복함으로써, 지식 이상으로, 그는 토라와 미쯔봇을 지킬 수 있다. 힘에 의해서, 지식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사고나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빛을 실제로 받음으로써 그것이 가능합니다. 빛은 지식 너머에 존재할 수 밖에 없어요. 받으려는 의지 및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는 방법에 관련된 모든 생각 너머에서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
우리가 선하고 악한 일들로 경험하는 이 힘은 창조주의 왼쪽과 오른쪽 손으로, 그것이 우리 삶의 일상적 일들을 통하여 오르막과 내리막이란 수단을 이용해 우리를 안내합니다. 일단 우리에게 신에게 곧바로 가려는 이 욕구가 있으면 이것이 올바르게 이해됩니다.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이 특별한 욕구는 발달을 하고, 결과적으로 가상 세계 전체를 에워싸서 들이켜버린 후 우리를 현실과 완벽하게 연결시켜 줍니다
카발라 글의 아름다움을 그저 맛만 보았습니다. 이들 글들과 카발라 안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탐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이 수업에서 다루는 것은?
- 창조의 생각은 피조물을 창조하여 무한한 기쁨으로 그것을 채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진화를 이끄는 힘이다. 우리들은 오직 한가지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완벽하고 영원한 상태에 이르려는 목적이다.
- 우리는 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에서 달아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고유의 본성이다.
-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우리 발달에 필요한 단계이다.
- 고통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원인을 묻도록 하는데 있다.
- 고통의 원인은 우리 고유의 본성(이기심)이 그것을 창조한 본성(이타심)에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 이 원인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들은 삶의 발달 과정 속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게 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통과 재앙의 파도가 치기 전에 발달할 수 있으며, 우리 발달을 가속화하여 여러 겁의 생에 걸쳐 이룰 발달을 하루만에 완성시킬 수 있다. 한펴느 그와 동시에 우리 고유의 이기적인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